|생각하는 신앙| N번방에 나타난 악의 심리학 _ 노승수 목사

0
186

생각하는 신앙

 

N번방에 나타난 악의 심리학

 

<노승수 목사 | 강남성도교회>

 

성적 문제의 해답은 영혼과 심신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확장과 실천이다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보도된 “포르노 산업”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도색 잡지, 음란 컴퓨터 프로그램, 성인용 유선 방송, 나체 쇼, 음란 연극, 음란 비디오, 성행위 보조 기구 등을 위해 쓴 돈이 약 80억 달러이며, 이 중 7억 5천만 달러 내지는 10억 달러 정도가 음란 전화비용으로 지출되었다고 보도했다. 20년도 더 된 통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실태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에서 N번방, 박사방 등을 만들어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만든 음란물을 공유한 일당이 붙잡혔다. 여기 가입자만 30만 명이라고 하니 앞서 소개한 리포트가 국내에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미성년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소녀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그것으로 돈벌이한 자들이나, 관음증처럼 그것을 보려고 수십 수백만 원을 내고 기웃거린 남자들이나 모두 지탄받아 마땅하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N번방 가입자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자이며 직분자일 것이라는 점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으로 인해서 이런 범죄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을 것은 쉽게 예상된다. 성은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힘든 욕망이며 가장 사회화될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던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내를 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아내나 남편이 있더라도 원만한 성생활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범죄를 부르는 내면의 심리가 무엇이며, 신자는 무엇으로 이것을 예방하고 벗어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심리를 잘 보여주는 연구 조사가 하나 있다. 미국 보스턴 지역의 성 구매 남성 101명과 비 구매 남성 101명을 대상으로 각각 두 시간씩 면접 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성 구매자들은 비 구매자들과 비교하여 성매매 여성의 감정 상태를 예측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였고, 여성들의 실제 느낌과 벗어난 감정 상태를 표현했다. 이것은 성 구매자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성매매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들의 호색적인 특징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방 운영자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어린 여성들을 유인한 후 그들의 주민등록증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인들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으로 그녀들을 수렁에 몰아넣었다. “협박”으로 대표되는 그의 성격적 특성은 이런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관계 방식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띠고 있다. 성이 사디즘과 마조히즘과 같은 변태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 역시 이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스캇 팩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마귀의 핵심적인 심리를 자기애라고 밝혔다. 자기애란 소통은 없이 타인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필요를 채우는 일종의 “인간 소비”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타인과 하나님은 그저 자기 욕망의 대상이며 소비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가 N번방 사태를 관통한다. 그 30만 명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 것이다. 자기 딸 같은 아이를 보고도 공감과 소통의 반응은 없이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형태가 도덕적 무감각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지 금욕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서 넘어져도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된 지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지닌 성적 지향과 에너지들을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목적이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제대로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이 삶에 반영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신앙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가 사람 편에서의 삼위일체적인 구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곳에 우리는 성자 예수를 통해서 초대받은 것이다. 성부와 성자 간 사랑의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중재하시는 성령의 연합을 따라 우리도 성자 예수와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 성부와 사랑의 교제에 초대를 받았다.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께서도 관계적 존재이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셨다(요한복음 3:35, 15:9, 17:23). 성자도 성부를 사랑하신다(요한복음 14:31). 그렇게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관계에 계셨고 우리를 그 관계로 초대하셨다.(요한복음 15:9) 성부와 성자의 이런 사랑의 관계는 성령의 중재를 통해서 드러난다(누가복음 3:22).

성적 문제들은 대부분 관계적 위기에서 비롯된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죄가 성적인 무질서였다. 원래 성적 에너지는 관계적 에너지다. 동시에 다른 것으로도 쉽게 변환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운동으로도 성 에너지는 발산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에너지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적 에너지다. 단지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온몸과 온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확장과 실천이 그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