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혁신보 800호 축하의 글|
“개혁정신의 길을 흐트러짐 없이
묵묵히 힘써 걸어 온 신문”
<이은상 목사 | 동락교회>
세상 언론은 여러모로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 총회 언론인 기독교개혁신보는 평화롭기만 하여 걱정된다는 어느 동역자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기독교개혁신보를 받아 보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린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언론은 좌나 우로 치우침이 없어야 하지만 우리 총회 언론은 좌도 우도 없는 듯 아무 적도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글을 올린 것은 나름대로 합신을 너무 사랑해서 함께 종아리를 맞자는 심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또한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글은 종아리가 아닌 상대방의 뺨을 친 것과 같은 부적절한 글이라 여겨집니다.
필자는 열렬한 기독교개혁신보 정기구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령 800호를 맞이하는 개혁신보를 축하하며, 혹자와 같이 기독교개혁신보와 먼 이웃으로 지내는 변방의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지금 시대는 언론의 방사능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오염 수준을 볼 때 마실 물이 없을 뿐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려도 위험한 글들이 정말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기독교개혁신보는 자꾸 희미해져 가는 노안을 신문지에 바짝 붙여 대면서까지 읽을 만한 정론임을 확신합니다.
기독교개혁신보를 잘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새벽종처럼 영혼의 공명판과 같은 시론을 읽어 보셨는지. 설교자와 성도에게 신학의 나침반과 같은 기획 및 특집의 글들을 자세히 끝까지 읽어 보셨는지. 개교회와 신앙의 희로애락을 겸손히 나눌 줄 아는 그 따뜻함을 느껴 보셨는지. 신학과 정치, 성경과 문화의 씨줄과 날줄을 제대로 엮어 내는 사설은 설교자에게는 마중물과 같아 자꾸 기다려지게 됩니다.
글이나 말이나 행동에는 침묵정진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언론과 어찌 어울릴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일반 논객이나 필객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묵향에 취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글과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묵향을 감출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기독교언론은 퐁당퐁당 누나 몰래 던지는 놀잇돌이 아닙니다. 때로는 던지고 싶은 그 돌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어야 할 때가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언론은 함부로 들레지도 말고 설레지도 말고 침묵정진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돌을 던져 만날 블레셋을 이긴 것은 아니지요.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질 때 이스라엘 군대 안에는 아마 물맷돌 부대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직업과 은사는 돌 던지는 일이었습니다(대상12:2, 대하26:14). 이들은 다윗이 돌을 던질 때 나대지 않고 침묵함으로 다윗을 도왔습니다.
기독교개혁신보는 침묵정진으로 800호 지령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문서선교의 자리매김을 다해 왔습니다. 개혁정신의 길을 흐트러짐 없이 묵묵히 그리고 힘써 걸어 왔습니다. 손 안의 매스컴인 핸드폰으로 인한 광장신학(狂場新學)과 쓴뿌리 이론들이 이불 속까지 파고들어 오는 혼란한 시대 가운데서 기독교개혁신보는 ‘제대로’를 가리키는 네비게이션입니다.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돕는 엘이디 조명등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색되지 않는, 가까이할수록 복을 얻을 수 있는 뉴스페이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