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강| 개혁주의 교회는 ‘팀 켈러’로부터 무엇을 배울까?<3> _ 고상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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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주목받는 리디머(Redeemer)교회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의 목회 철학을 들여다보고 개혁교회가 받을만한 교훈과 적용점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 편집자 주

 

개혁주의 교회는 ‘팀 켈러’로부터 무엇을 배울까?<3>

 

<고상섭 목사 | 그사랑교회>

 

<글 싣는 순서>

  1. 복음의 상황화
  2. 문화의 상황화
  3. 따뜻한 개혁주의

개혁주의는 그 신학의 기초부터
따뜻함을 포함하고 있다

신학의 기초가 은혜 위에 있는 것이
겸손한 개혁주의다

은혜의 복음이 겸손을,
그 겸손이 결국 연합을 낳는다

 

  1. 따뜻한 개혁주의

 

개혁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개혁주의를 사랑하지만, 자칭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좀 거리를 두는 편입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분들 중에는 전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성향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 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도 개혁주의 신학의 탁월함과 통일성에 매료되어, 다른 신학과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일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개혁주의 안에서도 자성의 소리가 있을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 바로 ‘따뜻한 개혁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다.

왜 개혁주의자들은 따뜻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팀 켈러 목사는 그런 현상이 신학은 바른데 성품의 문제라고 진단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자가 따뜻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의 신학의 기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개혁주의는 그 자체로 따뜻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8년 팀 켈러 목사가 한국에서 목회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곳에 참석했을 때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배경이었다. 많은 세미나를 참석하기도 하고 진행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세미나는 개최하는 교단과 목회자의 성향과 비슷한 사람들이 오는 편이지, 전혀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목회자의 세미나에 다른 신학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팀 켈러의 전달방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팀 켈러는 확실한 개혁주의자이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매우 겸손하다. 아마도 뉴욕에 있는 회의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더욱 훈련된 것 같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복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복음의 전달방식도 중요하다. 권위를 탈피하는 시대에 권위적으로 전달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컨퍼런스 강사로 온 분들 중에 팀 켈러에게 학생 때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목회자가 있었다. 그에게 팀 켈러 목사의 특징을 물었더니 1초도 지체하지 않고 “겸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30년 가까이 함께 있었던 사람의 증언이라 더 충격적이었다. 다른 많은 특징이 있을 텐데 ‘겸손’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의 삶에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겸손은 단순히 훈련을 통해 도달하는 영역이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통해 열매 맺는 것이다.

 

복음은 겸손을 낳는다

팀 켈러는 복음을 말할 때, 인간이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무엇이라 정의한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드린 그 은혜의 구원을 복음이라 말한다. 만약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면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잘남을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이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다. 또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보다 더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은혜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통해서 결국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내가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는 죄인 됨에 대한 인식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철저히 죄인 됨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겠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기초로 하는 신학이다. 그렇다면 철저한 개혁주의자들이야 말로 죄인 됨을 고백하며,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잘못 인식되면 율법주의자로 변질된다. 그러면 도덕적 탁월함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은혜의 감격과 죄인 됨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상실한 개혁주의는 결국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을 닮아가게 된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은 잘못된 복음의 예를 잘 설명해 준다. 이 책은 누가복음 15장을 기초로 한 설교이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서 탕자로 돌아왔을 때, 첫째 아들은 그를 받아준 아버지에게 불만을 느끼며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15:29)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살았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열심히 한 만큼 어떤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선행이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그 반응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보상이나 우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아들을 또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눅 15:30). ‘이 아들’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동생을 무시하는 표현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자신은 더 의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배제를 통해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자신을 높인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충동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월하다고 느끼며 자신들의 문화를 최고의 것으로 우상시 한다 …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혜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팀 켈러는 상대방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신학은 바른데 성품에서 문제가 조금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품을 조금 고치면 균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기초가 은혜 위에 있지 않음을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내 주는 것이라 말한다.

 

겸손은 연합을 낳는다

이것은 구약의 유대인이 가졌던 오류와 동일하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셨지만, 그 구원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무시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라는 교만한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의 초창기에 이런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초창기 리디머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불쌍하게 내려다보는 잘못된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처럼 우리가 도시의 구원자인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겸손히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워야 한다 … 우리는 얼마나 쉽게 복음을 망각하는가! 결국 복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셨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된다 … 복음만이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고 (우리는 뉴욕이라는 도시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자신감을 주고 (나는 도시에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용기를 준다 (나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타인을 축복하는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이 말이 우리가 세상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다른 어떤 신학보다 통일성과 균형이 있는 신학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과 은혜의 방식과는 거리가 먼 생각일 것이다.

팀 켈러는 복음은 우리를 반드시 겸손하게 하고, 그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으로 드러나며, 결국 사람과 사람사이에 ‘연합’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탁월한 신학이지만 크신 하나님의 전부를 다 이해하는 신학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들이 개혁주의보다 부족한 부분들이 많을지라도, 그들과 연합하고 대화하며 배울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협력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연합하는 범 교회성을 부인하는 우월주의는 문화적 유연성과 겸손한 복음의 부재를 반영한다. 또 팀 켈러는 한 교회가 지역의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교단이 다르지만 그 지역을 섬기기 위해 연합할 것을 강조한다. 은혜의 복음이 겸손을, 그 겸손이 결국 연합을 낳는 것이다.

이제 ‘따뜻한 개혁주의자가 되자’라는 말보다 ‘그냥 개혁주의가 되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따뜻한 개혁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자라면 반드시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변화는 복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따뜻한) 개혁주의자인가?” <끝>

 

* 고상섭 목사 _ 합신 졸업. 제자훈련연구소, CTC korea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