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국제적 상생성 회복을 촉구한다
일본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3대 품목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명단)’ 제외 결정으로 후폭풍이 거세다. 일차적 뿌리는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과 작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로 개인적 손해배상 청구권은 국가 간 협정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는 국제인권법에 기초한 한국 측 주장의 대치에 있다. 그러나 진짜 뿌리는 일본의 패권국가 지향성의 정신사적 궤적에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1946)에서 일본인은 작고 아름다운 국화(평화)를 추구하지만 그 속에는 칼(전쟁)을 품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일본의 이중성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1991)에서 더 실효적으로 분석되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인은 우치(안, 국내)와 소토(밖, 국외)의 구분이 너무 극단적이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베트남 난민들이 보트에서 죽어갈 때 체면치레로 단지 3명을 구조하는 데 그쳤다. 당시 머나먼 스칸디나비아에서만 수천 명의 난민을 수용한 것과는 극 대조를 이룬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에서 큰 이익을 보고도 식민침략의 피해국 한국에 대한 정당한 사과와 배상에는 인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일본은 국제적 상생성이 필요한 확대의 세계, 글로벌한 화합적 자리에 동참함에 몹시 냉정하다는 뜻이다. 이어령은 “일본인은 세계를 향해 가슴을 열지 않는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을 인용하며 폐쇄적 일본의 자국중심 집단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다. 일본이 축소지향할 때는 번영 성공하지만 히데요시처럼 이기적 확대지향을 하면 전혀 다른 일본이 되어 이웃 나라를 침략하거나 폐를 끼친다. 이런 분석은 작금에 경제대국에서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려 하는 아베 정권에 큰 경종을 울린다.
아베는 “아름다운 나라로”(2006)를 출간하고 총리가 됐지만 재취임한 2기 정권에서는 “새로운 나라로”(2013)라는 수정본을 출간했다. 그는 일본 전후 체제의 배경인 민주 평화주의를 부정하고 공동체적 국가의식을 고양하며 일본 군국주의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그의 재임 중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가 공공연히 활용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것이 정녕 아름답고 새로운 일본일까? 국제적 상생의 연을 끊어버리면서까지 경제를 디딤돌로 패권국가가 되겠다는 야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결국 패권국가 지향성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재군국화의 길을 재촉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보호무역의 흐름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최소한 보편적 국제 상도덕과 상생의 질서와 네트워크를 무시하는 행위는 파국의 지름길임을 아베 정권은 알아야 한다. 일본은 그나마 1993년 ‘고노 담화’로 위안부 강제 동원을 사과했고 1995년 ‘무라야마 담화’로 식민 지배와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2차대전 전범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퇴행이 시작됐고 아베는 더 노골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못한 게 매우 통한스럽다.”라며 고노 담화 수정을 시도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였다.
야스쿠니에서는 일본군과 그들을 위해 희생된 개와 말의 영혼까지 위로해 주며 침략전쟁을 미화하지만, 일제 강점의 범죄와 위안부 및 강제 징병, 징용 한국인에 대한 사과와 배상에는 철저히 비인도적 자세를 취한다. 이런 일본의 후안무치에 비해 독일의 진정한 사과와 국제 관계 회복의 노력은 큰 신뢰를 주고 있다.
독일의 모슬러 교수는 8월 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과거사가 다 해결됐다는 입장인데, 과거 만행의 청산 문제를 법리로만 따지는 것은 독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면서 나치의 만행은 사죄와 배상으로 못 지우며 계속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웃 피해 국가에 대한 사죄는 현재와 미래에 좋은 관계 유지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를 거듭 이어 가고 있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을 사죄했다. 2004년 슈뢰더 총리는 “부끄럽다.”고 했고 메르켈 총리도 2013년 히틀러 집권 80주년에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잊지 않겠다.”고 반성했다. 최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부 장관도 8월1일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75주년 기념식에서 “독일인, 독일의 이름으로 폴란드에서 저지른 일이 부끄럽다.”고 거듭 사죄 반성했다.
일본 아베 정권은 일본을 진정으로 세계사에 아름답고 새로운 나라로 기록하고 싶다면 쇼비니즘적 패권국가의 야망을 버리고 진정한 반성의 자리에 서야 한다. 일본의 이기적 자세로는 세계사회에 공헌하기 어렵다. “독일인들은 유럽의 일원으로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지만 일본인들은 동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엄중한 진단을 참고해 지금이라도 독일의 자세를 본받고 국제적 상생성을 회복하기 바란다. 칸트의 정언명법을 빌려 충고한다. “당신의 나라가 하려는 일이 항상 동시에 모든 나라들이 해도 괜찮은 보편타당한 일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그리고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황금률로 역지사지하기를 진심으로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