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가장 넓고 부요한 목회 _ 임용민 목사

0
252

목회칼럼

 

가장 넓고 부요한 목회

 

<임용민 목사 | 새소망교회>

 

개혁 장로교회 목사에게 말씀을 준거한 목회는
최소한 웨스트민스터 총회 문서들에 따르는 것이다

개혁 장로교회의 목회는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가장 넓고 보편적이며 효과적인 목회의 길이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매우 좁고 답답하다.”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정말 많이 한다. 심지어 개혁주의 장로교회 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고 실천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정말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이런 것인가 오랜 시간 고민해봤다.

그 결과 이 표현에는 개념에서 있어서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목회가 무엇인가?”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목회에 대해 현대 기독교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나, 목사 개인의 일정한 뜻이나 경험을 따라 교회를 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목회에 대해 “목사가 교회를 맡아 설교를 하며 신자의 신앙생활을 가르치고 지도함”이라고 정의한다. 사전적 개념에서 목회는 실천적 의미만 설명되고, 목회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대적 개념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참말로 좁고 답답한 것이 맞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최우선적 기준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이 표방하는 신론적 개념의 실천을 말한다. 이것은 간략하게 말하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목회를 말한다. 이 목회는 그 구체적인 방식에 있어서 인간의 뜻이나 목적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준거하여 행할 뿐이다.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거한 목회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이나 현대주의적 사조를 따라 판단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소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에 나오는 “장로교회 정치 형태와 목회자 임직”에 관한 내용을 따르는 것과 “공예배 지침서”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따르는 것의 유익은 매우 크다. 이것은 목사의 개인적 능력을 믿거나 의존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최소한 목사로 하여금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목사로 부르실 때 선서한 그대로의 신앙 양심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고 보호해 준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을 목회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뜻을 따라 교회를 운용하는 것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틀림없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회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고 비현실적일 것이다.

둘째, 좁다는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좁다 혹은 그 반대로 넓다의 문제가 아니다. 쉽게 말하면, “나도 성경을 알고 너도 알고 있으니 서로 조금 달라도 존중하면서 목회하면 어떠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이고, 결정적으로 모두 타락한 존재들이니 어떻게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정치와 예배 모범만 따를 수 있느냐?”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을 다양성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들을 자신의 목회에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가장 작은 것이라도, 부패하고 타락한 우리가 만든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칼빈은 이 말씀을 통해, “인간 생명의 허약성”을 설명하고, 동시에 “인간 소유의 탁월한 것들이 무(無)”의 성격을 가졌음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에 더하여, 타락하였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오는 아름다움, 즉 인간의 기품과 존숭함이라도 “중생의 은혜와 정반대”되는 헛된 것으로 정죄 받을 것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인간에게서 나온 꽃과 같은 것들이라도, “재빨리 사라지고 썩어지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고 숙고한다면, 나름대로 최선이라는 말을 무기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타락한 방식의 사고와 행동으로 대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좋아하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의 다양성을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보다 더 중요한 것이며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참으로 좁아 보일 것이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정치와 예배 모범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와 그 실체적 속성과 실체적 속성의 교류의 통일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의 구별성과 분리됨이 없는 뜻의 의논에 따른 작정을 따라 성경 전체 교훈에 총괄하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이것들의 드러내는 내용과 진리보다 인간의 다양성이 훨씬 더 넓고 보편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뜻과 분리됨이 없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창조와 섭리 세계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제시하셨다는 면에서, 감히 말하건대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가장 넓고 보편적이며 효과적인 목회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로 하여금 부패한 우리의 본성에서부터 나온 거짓되고 타락한 방식으로 목회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목회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잘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식과 목적에 합당한가의 싸움일 뿐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 기독교강요 1권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달려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결코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실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찬란한 모습이 우리에게 마치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미로(迷路)와도 같아지기 때문에, 그 말씀을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차라리 그 길 바깥에서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순전한 신앙이 번성하기 위해서 미신이 세상에서 제거돼야 한다고 거듭거듭 선언한 다음,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여기서 ‘통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정당한 주권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교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개혁주의 장로교회 신학을 따르는 목사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이 말하는 내용을 따라 목회하기로 선서한 목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신학에 대해 좁다고 말하기 이전에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이 말하는 내용에 먼저 익숙한 자들이 돼야 한다. 그리고 그대로 목회하길 힘쓰고 애써야 한다. 선서한 그대로 목회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우선적인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좁은 목회, 답답한 목회라고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목회를 비판하는 것은 이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을 따라 목회하는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의 길이요, 가장 자유로운 목회임을 알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