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피랍사건을 계기로 본 ‘선교한국’을 말한다_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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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사건을 계기로 본 ‘선교한국’을 말한다

이광호 목사_고신대학 Th.D, 실로암교회

시작하는 말

최근에 발생한 아프간 피랍 사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피랍자 가족을 비
롯한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미 발생하여 진행 중인 피랍사건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동일한 사태에 대한 상당수 일
반 국민들의 곱지 않은 시각과 반응이다. 납치당해 고통당하는 형제들로 인
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깊은 우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일부 불신
자들은 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정황들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모습과 해외선교에 대한 전
반적인 성찰과 더불어 깊은 반성을 해야만 한다. 특히 이슬람과 이슬람권 선
교에 대해 더욱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교회와 해외선교에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들을 냉철하게 살펴보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 이슬람, 그들은 누구인가?

피랍자들 가운데 과격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들이 생
겨남으로 인해 이슬람에 대해 크게 오해할 우려가 있다. 지금 아프간에서 납
치를 주도한 ‘탈레반’이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알 카에다’ 같은 조직
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대한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순수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
해해야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중에도 과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
다. ‘탈레반’같은 경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서 그들 중 다수는 극도
로 과격한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탈레반에 속한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가 
다 그럴까 하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이슬람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가
운데서 과격주의자들로 인식되는 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

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로 인해 이슬람 전체가 오해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
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이슬람권 선교와도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이슬람이 과격한 종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하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
다. 이 말을 일반 이슬람교도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
의 종교가 ‘평화의 종교’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란 말 자체
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같은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은 주로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전수받은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쪽에서는 서구인들이 믿는 기독교가 도리어 ‘칼의 종교’라 이해하
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난 세기 중반 이후 일어났던 중동전쟁, 
걸프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지에서 발생한 전쟁들은 서구의 무
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믿는다. 전쟁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살상무기들 중 
절대량은 서구, 특히 미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미국이 첨단 살상무기들을 대
량생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슬람교도들은 대개 기독교인들을 서구인과 밀접하게 연관
된 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이슬람’이라 하면 
곧 아랍인들을 연상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교도들이 아랍 지역의 나라들과 상당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간주하
려는 경향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들은 우리 같은 동양인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서구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독특한 종교적 관점을 잘 
이해해야 할 것 같다. 

2. 선교 제국주의적 사고부터 바꿔야

한국교회가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 자체가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성
경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 없이 말씀에 입각한 훈련을 받지 못한 교인들은 선
교지에서 도리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양적인 것을 자랑으로 삼는
다는 사실은 질적인 면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주님의 복음을 얼마나 온전히 드
러내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순종하
는 겸손한 삶의 모습이
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권 선교는 이슬람을 기독교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선교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우리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저들로 하여금 그 복음의 의미를 깨
닫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이슬람권 선교에서 그 동안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사실 우리는 선교적인 성과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고 
논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성과보다 과정을 되돌아보며 그로 말미암
은 결과들을 반성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본다. 설령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하
더라도, 선교라는 명분을 통해 도리어 저들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든다면 그것
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슬람권 선교를 돌이켜 볼 때 이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적대 관계로 보
게 만든 것이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지나치게‘공격적’이었다는 말
이 옳다. 따라서 그것을 종교 정복주의적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선교제국주의에 물들어있는 결과로 볼 수 있다. 

n예를 들어, ‘역 라마단 운동’은 우리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슬
람에서는 라마단(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데, 기독교에서 
그 달에 맞추어 대대적인 역 기도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사월 초파일’날 각 도시마다 의도적인 대형 기독교 집회를 벌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종의 종교적 맞불작전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중요시하는 성
탄절이나 부활절에 불교도들이 의도적으로 거리거리마다 대형 연등행사를 한
다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해외에서 복음을 증거 하려는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민족적 우월감이나 경
제적 혹은 문화적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개 일종
의 우월감을 가지려는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런 형태의 우월감은 이기적 자
만심과 더불어 다른 민족이나 종족을 내심(內心) 멸시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국에 가서 한국산 자동차나 한국 제품들을 보면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적어도 선교를 위
해 선교지에 나가는 성도들이라면 결코 그런 것으로 인한 우월감을 가져서

n는 안 된다. 복음 이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야 한
다. 

3. 진정한 선교 정책은 ‘이웃사랑’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이중성을 띠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엄
청난 수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라 스스로 자랑하면서 정작 한국교회
의 내부는 형편없이 타락해 있다. 이는 마치 자기 가정에서는 부부간의 심각
한 불화가 끊이지 않으면서 바깥에서는 남의 가정문제를 해결해주려는 행위
와 일면 유사하다. 
또한 한국의 절대 다수 기독교인들은 명분 없는 ‘선행’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선행을 하면서도 그것을 전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전도에 응하지 않으면 선행을 하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다. 이는 지극
히 유치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행동은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미성숙한 교인들은 연보(기부)를 하든 봉사를 하든 일단 자기 이름 석자가 
연결되어야만 그렇게 하려 한다. 세속화된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 그렇
지 않은 교회들이 있겠지만 대개는 자기 교회의 이름을 외부에 드러내기 위
해 특별한 선행
을 하려 하는 것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하기’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훈련되어 있지 않
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의 교인들은 전도를 할 때도 대개 자기가 모
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친척이
나 불신자인 친구들에게 전도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
인 자신의 이기적인 삶이 저들에게 이미 노출되어 버렸다는 부담 때문이 아
닐까? 
대중 전도에 열성적인 교인들은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기차역 광장이
나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 같은데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때로 춤을 추
며 공연을 하기도 한다. 그런 식의 대중적인 전도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정
녕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복음을 증거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다. 
아프간의 피랍 사건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있는 가운데서도 상당수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이토록 냉소적인 까닭은 결국 이웃을 전혀 고려하
지 않는 그런 식의 전도방법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전도가 아니
라 도리어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면 어떻
게 할 것인가? 결국 전도의 이름으로 전도를 
가로막은 이상한 꼴이 되어 버
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해외 선교에서도 이와 동일한 고려를 해야만 한다. 이슬람권에서는 선교라
는 용어가 필요 없다. 다른 선교 지역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교라는 용어
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를 구분하여 이해하기 위함일 뿐 그에 필요 이상의 의
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특정지역으
로 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 가서 살게 된 성도들에 의해 자
연스럽게 복음의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의 여러 지역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에는 한국 군인들이 
많이 파견되어 있다. 현재 이라크도 마찬가지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복
음을 아는 성도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성도로서의 삶을 살면 된다. 남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생각되고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지 못할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이
다.
다른 선교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에 가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
이나 공관 직원들, 그리고 다양한 국제단체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성도들
이 많이 있을 것
이다. 그들이 현지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신앙을 드러내면 된다. 특히 이슬람권
에서의 의도적 선교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이 기독
교를 ‘칼의 종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기독교
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 

4. 극복해야 할 ‘선교 콤플렉스’

소위 선교사라는 직책과 명분을 가지게 되면 열심히 활동하지만, 그렇지 않
을 경우 복음의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줄어든다면 잘못이다. 나아가 
해외의 선교지에서는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면서 국내의 이웃들에게는 달리 
대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선교는 개별 성도들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며 나아가 보편 교회의 공적
인 사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절대적인 기초
로 해야 한다. 선교단체들은 선교적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무조건 많은 젊
은이들을 동원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해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 자
체로서 더 훌륭한 신앙인으로 간주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기독교 
선교와 관련하여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국가와 지역들
이 많이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자
기의 종교심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마치 신앙이 좋은 것인 양 오해하는 경향
이 있다. 그런 잘못된 이기적인 신앙은 도리어 복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이슬람권이나 중국처럼 공개적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나라에 가서 여
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일
은 극히 자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믿는 증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선교가 허락된 나라에서 역시 마찬가지
다.
그렇게 하게 되면 정말 복음과 더불어 그곳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커다
란 부담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여
러 외국인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선교를 위한 명분
을 붙여 통성 기도하는 모습을, 불신자인 한국인들이 보게 된다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게 될까? 

결론 : 회복돼야 할 복음전파의 본질

이번의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한국교회가 거듭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것
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
른 교회성장과 선교가 가능하다. 국내의 교회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그에 속한 교인들은 선교사의 이름을 붙여 해외로 나간다 해
도 국내에서 익힌 그 행태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와 선교에 대한 천박한 성과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는 해외선교가 마치 유행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다 보니 저절
로 파송 선교사의 수와 규모를 통한 성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번 아프간 피랍사건에 대해서도 좀더 냉철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
가 있다. 피랍자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 타종교인들이었다면 사람들이 어떻
게 반응했을까? 한국의 상당수 불신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관점에
서 아프간 피랍사태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종교 이기심으
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기독교인들의 
무모함이 이런 사태를 몰고 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를 비난하는 다수의 불신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로 말미암아 반감을 가진 것
이 아니라 외부로 드러난 기독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의 모습에 염증을 내
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저들의 공격적인 욕설을 들으며 그동안 한국교회가 저들에게 보
여 왔던 부끄러운 행태들을 반성하는 가운데 현재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
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더 균형잡힌 성숙한 자세로 현재의 사태를 직시하며 
적절한 교회적 대처를 해나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현재의 암울한 형편 때문
만이 아니라 미래에 이어질 한국교회의 건강한 성장과 해외선교를 위해 분명
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