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 한국교회 설교는 건강한가?(2)
예배에서 설교자의 위치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1. 설교와 회중
회중이라고 할 때 설교자와 구분된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즉 설교를 듣
는 성도들만 회중이 아니라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회중이다. 그 회
중 가운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따질 것 없이 설교자를 포함하여 예배에 참
여한 모든 성도들이다.
그 가운데는 부자도 있을 것이며 가난한 성도도 있다. 건강한 육신을 가진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병든 성도도 있다. 많은 지식을 가진 성도가 있는가 하
면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 마음이 평안한 성도가 있는가 하면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괴로운 심정을 가진 성도들도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환경
과 조건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선 회중은 모두가 차별 없는 하나님의
백성일 따름이다.
공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회중은 직분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서 언약공동
체를 이루고 있다. 교회가 가지는 가장 본질인 예배
의 의미가 이들 가운데
서 이 때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매주일 공예배에 모이는 회중을 통해
주님의 재림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지게 된즉 예배와 그 가운데 존재
하는 설교는 단편적 의미가 아니라 보편교회 가운데서와 우주적 교회 가운데
서 입체적이며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시대는 인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인위적인 예배가 조작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대신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설교하는 시대가
되어 있다. 예배의 분위기를 통해 성도들의 종교적 기분을 맞추려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성도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설교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저급한 문화의 반
영일 따름이다. 이런 문화가 교회에 지배적이 되면 설교자는 인기 있는 설교
자가 되기 위해 청중의 귀에 맞는 말 만들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순수한 복음에 세속적 물타기 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된다.
현대교회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설교가 설교자 자신의 권한이라
는 생각과 미성숙한 대다수 교인들이 시대적 대중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
하시는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
하며 선포해야 하며 성도들은 그에 온전히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뛰어
난 언변이나 전달 기술로써 교회부흥을 가져오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
한 발상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설교의 중심이 되는 것은 ‘설교자가 드러내
는 정도’ 또는 ‘설교자를 통해 역사하고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게 되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언변에 따라
조종될 수 있는 범위 속에 축소되고 만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공예배
중에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을 공적으로 섭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임을 알
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설교자에게 자신의 취
향에 따라 설교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가 될 우려가 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교인들은 시대적 종교유행에 따른 설교를 듣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
r
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교회 앞에 선포되는 설교가 기록된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
며 선포하고 있는지 여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
체 회중에게 선포된다는 의미는 특별한 형편에 놓인 성도들을 편향적으로 의
식하지 않고 보편 교회 가운데서 공적으로 말씀이 선포된다는 뜻이다. 즉 설
교자는 빈부의 차이, 지식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환경의 차이
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증거해야 한
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동일한 본문으로 하여 말씀을 선포한다면 누가 설교를 해
도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성도들의 현실적 생활여건
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부자에게는 그 부로 인해 세
상을 괜찮은 곳으로 생각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가난한 자들에게는 세상
의 것의 부족함에 대해 너무 민감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것이 도리어 진정한
복일 수 있음을 적용하게 된다.
우리가 가장 명심해야 할 바는 설교자가 회중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
라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목사도 회중 가운
데 속한 한 사람의 성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단순히 교인들을 가르치거나 교훈하는 행위가 아니다. 설교자도 자
기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자여야 한다. 설교자
는 성도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자신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그 말씀을 경청해
야만 한다. 즉 설교자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전
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직분을 통해 설교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
들이 그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설교자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진설하고 그 생명의 양식을 온 회중
과 더불어 함께 먹는다. 이는 목사가 집례하는 성찬식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
께 목사 자신도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를 기념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목사를 통해 진설된 그 생명의 양식을 온 회중이 함께 섭취함으로써 성도들
에게 생명이 공급되며 유지된다. 주일날 공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적인 교회의 상속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하고 있
는 것이며 흩어진 보편교회 가운데 속해 있음을 확
인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설교자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의 종교적 목적
을 이룩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잘못된 설교자는 자기의 종교적 주장을 구체
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종교
적 신념을 교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성경을 빗대어 설교하려 해서는 안 된
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는 자신의 판단과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
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여기 저기서 끌어와 종교적 궤변을 늘어놓게 된다.
결국 성경을 설교시간 앞뒤에 조금 언급하고는 나머지 시간은 자기 주장을
펼치는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설교에 앞서 성경 본문을 읽지만 그 말씀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엉뚱한 종교적 자기 주장을 강조하게 되면 결국 성경에 계시된 하
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우주적 교회와 보편
교회에 속한 설교자로서 공인의 위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2. 목사와 설교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느 누구도 소
위 기득권을 가지거나 교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허락하
신 은사로 제정된 직분에 의해 교회가 새워져 가게 된다. 즉 주님께서는 특
정한 개인의 능력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의해 자신
의 교회를 세워가시게 된다.
우리시대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점차 허물어져 가는 지극히 안타까운 시
대이다. 그것은 직분의 파괴현상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무교회주의 운동과
평신도 교회운동은 그로 인한 한 경향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일들이 발생
하는 것은 지상의 조직 교회가 참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되고 교회 내에 직분
을 기득권으로 오해하는 교권주의자들이 등장함으로써 발생된 문제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교회와 직분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의 특별한 은사로서 교회의 세움을 받은 목사와 그를 통해 선포되는 공예배
에서의 말씀선포 즉 설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
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를 찬양하는 것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가장 기본되는 신앙행위이다.
목사는 설교를 전담하는 단순한 전문기능인이 아니다. 전문기능인은 연습이
나 훈련을 통해서 더 잘 할 수 있지만 설교자
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허
락하신 교회적 은사 없이 웅변력을 갖춘 연사처럼 호소력이 있다고 해서 올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는 설교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를 통해 말씀을 증거하며 선포하
도록 교회의 세움을 받은 성도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되풀이되는 연습이나
경험을 통해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가
는 성숙을 통해 올바르게 설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증거하며 선포하는 진
정한 설교가 있는가? 한국교회의 진정한 설교가 무너지게 된 것은 한국교회
의 그릇된 설교역사와 맞물려 있다. 그런데 대다수 목회자들은 그 잘못된 설
교방법을 마치 모범인 양 가르치며 배우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설교를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존하고 있다면 어쩌
면 진정한 설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신앙생활을 하
던 초기부터 줄곧 잘못된 설교만을 배우고 들어 왔다면 설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설교가 사라졌다는 말은 전혀 새로
운 말이 아니다. 극히
소수의 강단을 제외하고는 성경과 개혁자들(The Reformers)의 표준에 비추
어 볼 때 거의 모두가 깊이 병들어 있다고 하든지 아니면 발육부진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런 불건전한 교회의 시대적 형편에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냉철한 비판없이
설교를 배우고 익히게 되면 결국 병든 상태의 설교가 퍼져나가 교회를 전체
적으로 크게 오염시킬 수밖에 없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이다. 교회의 가
장 소중한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노래한
다. 그것은 주일 공예배를 통해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상속되어 가
야 할 본질적 내용이다.
그 공예배의 가장 중심에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있으며 그 말씀에 성
례와 축도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다음에 기도와 찬송, 연보, 권징
사역의 순서가 말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말씀선포는
공예배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천상의 교회와 우주적 교회 및 역사적
보편교
회에 연결되어 있다.
설교자가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회중 앞에서 남보기에 훌륭한 설교를 하고
자 하는 유혹이다. 그렇게 되면 자칫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을 마치 관객처
럼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 물론 설교를 잘 하려는 자세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국한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
다. 그러나 훌륭한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반 교인들로부터 인정받으
려는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배제할 수 없다.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일반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뜻
을 알아가고자 한다.
목사는 말을 잘하고 리더십을 갖추었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맡을 수 있는 직
분이 아니다. 설교는 결코 인간의 언변이나 웅변술을 통해 교인들을 설득시
키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
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교회 가운데 그 생명의 양식을 진설하는 거룩
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
면 안 된다.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부패한 물결이
끊임없
이 생성되는 세상의 풍조에 노출된 자신을 말씀을 통해 돌아보게 해야 한
다. 그것은 설교자의 달콤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을 통해서이다. 즉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변천해 가는 세속적 값어치 사
이에 발생하는 충돌현상이 설교를 통해 교회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
다. 이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구별된 모습을 확인하는 은혜의 방편이
기도 하다.
설교자는 결코 유창한 언변을 통해 성공적인 목회를 하려는 유혹에 빠져서
는 안 된다. 목회에는 소위 성공이나 실패라는 단어가 아예 없으며 올바른
목회와 그릇된 목회가 있을 따름이다. 소위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그
것을 통해 성공적인 설교와 목회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잠재하고 있다면 그것
은 매우 위험하다.
시대와 종교적 유행에 따라 다양한 설교방법들이 등장하는 것은 교회의 세속
화에 따른 현상일 따름이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자리로서 강단의 참다운 권위가 온전히 회복될 때 ‘교회 속의 세상’
을 극복하고 ‘세상 속의 교회’로서 구별된 섬김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진
정한 길을 찾게
될 것이다.
3. 마치는 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짓 설교를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하고 있으면서
도 그 위기에 심히 둔감하다. 우리는 영화 속의 소위 명설교를 기억하고 있
다. 예를 들어 유명한 기독교 영화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주기철
목사 역으로 나오는 영화배우는 짧지만 명설교를 한다.
많은 교인들이 그 영화 속의 거짓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또한 불신자가 소위 명설교를 하기도 하며 이단자가 그와 동일한 유
의 명설교를 하기도 한다. 나아가 불건전한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의 그럴듯
한 명설교들도 많다. 지금도 우리는 방송이나 서적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설교들은 거짓 설교일 따름이며 전혀 참다운 설교가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그 설교 아닌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
해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린 교인들은 자기 취향에 맞고 자기 정서에 맞
으면 쉽게 그에 반응하면서 종교적 감성에 젖어 들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
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 여하에 따라 소위 ‘은혜’를 받기도 하며 그
와
는 정 반대의 형편에 놓이기도 한다.
강단의 기능이 극도로 약화된 우리 시대의 이러한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
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며 선포하는 설교자가 우리 가운데 많이 나오게 되
기를 바랄 따름이다. “주님, 우리 시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