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교단 제25주년의 역사적 평가
윤석희 목사_천성교회 담임, 기독교개혁신보사장
합신교단 제25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면서 포럼의 주제를 ‘교단 25주년의
역사적 평가’라고 정해주셨다. 제가 알기로는 ‘역사란 역사의 주인 되시
는 하나님만이 평가할 수 있다, 혹은 다른 교단에서 우리 교단을 평가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제목이지만 이 발제문은
개인적인 생각과 주관적인 평가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린다.
1. 합신교단 설립의 역사적 배경
1981년 8월 12일에 작성된 총회 소집 준비위원회에서는 1981년 9월 22일
(화) 오후 6시에 남서울교회당(서울특별시 강남구 반포동 271-45)에서 있을
제66회 총회를 앞두고 총회 소집 선언문을 준비했다. 먼저 그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총회소집선언문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전래된 지 백주년을 맞는 이때 한국장로교
회가
세계 선교 사상 유래 없는 부흥과 성장을 이룩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
하신 은혜와 축복임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인위적 및 사상적 요인들의 작용으로 인
해 총회가 거듭 분열하는 비극을 경험해 왔고, 그 이후 장로교회 합동측 교
단이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며 성장하여 오던 중, 일부 교권주의자들
이 장로회 헌법을 부재상태로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 교단이 무질서와 불법
과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는 사분 오열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에 합동 교단의 부패와 속화 그리고 분열을 마음 아파하는 동지들이 수년
동안 총회의 정화와 합동을 위하여 진력하며 부분적인 합동만이라도 이루고
자 합동 총회를 성립시켰으나 거기에도 교권이 작용하여 다시 한번 실패의
쓰라림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교단의 개혁과 화합이 절망적임을 알고 우
리는 장로교 정치원리인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를 따라 총신 이
사회의 불법적인 교권 간섭을 거부하고 합동신학원을 설립한 교수들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총회
를 소집할
것을 합의하였다.
우리 총회는 바른 신학(딤전 6:3; 딤후 1:13), 바른 교회(딤전 3:15), 바른
생활(약 1:27)을 이념으로 하여 참신한 개혁주의적 신앙운동을 펴 나아가기
로 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의 개혁을 다짐하고
(갈 6:3-5), 또한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우리 총회의 입
장과 진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는 바이다.
첫째, 우리는 총회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이라 하며, 총회의 역사
성에 의거하여 제66회 총회로 소집한다.
둘째, 우리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
고(히 13:8-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렐奴訝���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
셋째,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인 하나님의 절대주권(롬 11:36), 성경
의 객관적 권위(딤후 3:16-17), 구원의 전적 은혜(엡 2:8), 그리스도를 머리
로 하는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엡 1:22-23), 적극적인 문화관(창 1:28)과 사
회봉사(약 2:22; 요일 4:20-21) 등을 신봉하고, 이상과 같은 바른 신학의 내
용을
흐리게 해 온 이질적인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개혁주의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데 힘쓴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며, 교회의 통치자라는 바른 교회
관의 확립과 모든 사역자들은 특권의식이나 주장하는 자세보다는 섬기는 자
세를 가지고(막10:45),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받들도록 힘쓴다.
다섯째, 우리는 경건생활에 주력하되 비성경적 행위인 지방색과 파벌의식을
타파하며, 교권쟁취를 위하여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
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고(마 6:33) 성경, 기도, 전도, 봉사에 전력하
는 교회상을 심어나가는 데 힘쓰고 우리의 생활에서 신앙과 윤리가 겸전하
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
여섯째,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소망이 바른 신학교육에 있음을
재인식하고, 교회와 사회의 여망에 부응하는 유능하고 수준 높은 교역자 양
성을 위하여 힘쓴다(딤후 2:1-2).
일곱째, 우리는 분열의 상처와 아픔을 거울삼아 자신의 정화와 개혁(딤전
4:16)을 중심으로 하는 진리운동을 추진할 뿐 아니라, 회개와 용서와 관용
의 정신
을 바탕으로 하여 화목과 합동운동(엡 4:1-6)을 펴 나아가는 데 최선
을 다한다.
여덟째, 우리 총회는 교권주의를 막기 위한 성경적 원리를 제도적으로 실시
하기로 만전을 기한다(마 23:8-10, 25-27). 이에 따라 교단 봉사에 있어서
목사들의 사역상 평준화, 교단 안에서의 각층의 의사 발표를 공정하게 보장
한다.
아홉째, 우리 총회는 이단의 침투를 거교단적으로 막되(요이 1:10) 이를 제
도적으로 실시한다. 그리고 현대교회의 속화운동을 성경적으로 정확히 지적
하고 이를 극력 방지한다(엡 4:14).
열째,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개혁하면서 독선주의나 폐쇄주의를 금물로 생각
하고(빌 4:5), 개혁주의 신앙과 개혁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기쁘게 영입한
다. 다만, 지원해 오시는 이들에게는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잠 19:2하반절)
위원회로 하여금 접촉케 하고 합리적인 서약절차를 밟게 한다.
열한째, 우리는 복음을 받던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어(행 20:35) 아시아
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신앙 노선과 같은 국내교
회 및 세계교회와 우호적 유대관계를 가지도록 힘쓴다(행 1:8; 엡 2:13-18).
열 둘째, 우리 총회
를 아래 일시와 장소에서 개회한다.
일시:1981년 9월 22일(화) 오후 6시
장소:남서울교회당(서울특별시 강남구 반포동 271-45
1981년 8월 12일
총회 소집 준비위원회
그리고 목사나 장로는 서약서에 서약하게 되어 있다.
서 약 서
1. 본인은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총회 소집 선언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2. 본인은 장로교회의 대원리인 장로(목사)에 의한 치리와 장로들의 사역상
평등과 삼심으로 된 치리제도의 바른 질서가 성경적인 진리임을 믿고 그대
로 실천할 것을 서약한다.
3. 본인은 성경말씀(딛 3:10; 요이 1:10)에 의거하여 현하 한국교회에 침투
하는 어떤 이단운동과도 관련된 사실이 없음을 서약한다.
4. 본인은 오늘날 교회질서의 혼란의 책임이 본인에게도 있음을 통감하여 회
개하면서 앞으로 교단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할 것
을 서약한다.
5. 본인은 이상의 내용을 성실히 서약하며, 위의 서약과 위배된 사실이 발견
되는 때에는 공적인 위치에서 자퇴할 것이며, 스스로 근신할 것을 서약한다.
이상과 같은 총회 소집 선언문과 서약서에 의거하여 합신교단이 발전하여 오
n늘의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고, 현재 합신교단 제25주년을 맞이하여 정책
위원회의 발의로 총회가 큰 대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역
사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만 평가하려고 합니다.
2. 합신 25주년에 대한 역사적 평가
1) 우리 교단의 초창기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이었다.
다른 교단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합신)이라고 명명되다가 2000년 9월 제
85회 총회에서 개칭되어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이다. 이유는 개혁이
라는 이름이 너무 많고 혼선이 빚어지기 때문에 다른 교단과의 구별을 위해
서 그렇게 했다. 다만 총회의 역사만 이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교단 명칭은 아주 중요하다. 명칭보다는 내실이 중요하겠지만 ‘개혁’이라
는 이미지와 ‘합신’이라는 이미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교단
이 신학교를 운영하는데 비해 교단이 합신이라는 명칭을 가질 때 마치 교단
이 신학교에 예속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2)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원리를 따라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교단이 형성
되기를 원하였다.
개혁주의적인 입장이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
국장로교
안에서 우리 교단이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의 정체성에 대한 인지도는 높다
고 말할 수 있다.
15-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주로 성경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고 하나
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원리를 따라 개혁주의 신학과 사
상이 발전되어 내려왔다. 그 아름다운 전통과 신앙을 이어가기를 원하면서
우리 교단이 1981년 9월 22일 오후 6시 30분 남서울교회당에서 제66회 총회
가 소집되어 새로운 교단으로 출범했다.
앞으로 우리 교단은 교단의 발전과 통일성을 위하여 종합적인 연구 검토가
이루어져서 교단의 정체성(identity)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선을 그어
주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원리와 더불어 목사나 장로가 장립받을 때 신앙고백
을 했던 성경과 예배모범, 권징조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렐奴訝���
등등을 잘 배우고 익혀서 우리들의 정체성이 드러날 만한 일에 전력 질주해
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 원리가 나타나는 교단으로 발전시킬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
총회 소집 선언문 중 두 번째 내용을 보면 ‘우리는 한국장로교회
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히 13:8-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서, 대렐奴訝���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
의 표준으로 삼는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교단의 많은 교회가 개혁주의적이지만 때로는 다양한 방법론으로
인하여 복합적이고 이합집산처럼 느껴지는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3) 총회 소집 선언문 서문에 나타난 대로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을 이념으로 교단이 발전되어 왔다.
지금까지 한국 교계나 세계적으로 깨끗한 교단이라는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좋은 교단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교단에 알려진 바로
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표어 자체는 상당히 좋으나 시대에 맞
지 않는다거나 독선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지난 25년 동안 하나
님의 은혜와 섭리 속에서 교단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이 시점에서 기득
권을 논한다든지 특정한 그룹이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
는 문제이다. 교단이나 학교나 다 같이 수고하고 다 같이
고생했다.
1980년 그 당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합동측의 정치적인 부패에 대하여 동
시 다발적으로 생겨난 다양한 반응과 현상이었다.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총
회원들은 총회적인 화합을, 교수들은 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노력을 했을
뿐이지 어떤 특정한 그룹이 선도하거나 주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장로교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생각해 보면 선교정책의 문제이든,
신사참배나 신학적인 문제이든 간에 분열과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
고 반성하는 가운데 교회의 통일성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님 앞과 세상 그리고 후손들 앞에 떳떳할 것으로 사료된다.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를 보면 알렌은 직접적인 설교나 복음 전파를 시도
하지 않고 왕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고 한국 왕실 선교에 주력하였
다. 이에 반해 언더우드는 거리나 지방으로 직접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
1888년 종교 금령이 선포되자 알렌은 언더우드를 서울로 소환해 ‘이 금령
의 발표는 경거망동한 순회 전도가 그 기본적 원인이 되어 있다’고 질책하
며, 선교나 전도에서 손을 떼고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만 전념하도록
종용했
다. 이때 언더우드를 비롯한 순회 전도자들은 알렌은 선교사도 아니라며 반
박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분열을 상징한 첫 사건이다.
그 후 교리적으로 자유주의적 성서해석, 양주삼의 성서고등비평, 변성옥계
의 조선기독교회와 하나님의 교회, 환상적 신비주의 유형에는 이용도와 백남
주가 있다.
해방 이후의 교회 분열로는 신사참배의 문제이다. 장로교 총회장 이인식이
총독부 교섭위원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면제를 요구했으나 거절
되자, 선교사들 중에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생각했지만 학교의 존폐 문제
로 인해 논의 끝에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미국의 남북 장
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입장이었으나 캐
나다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여 학교
경영을 계속해 나갔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자숙안을 결정했다. 당시 기성교회 인사
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 성도와 마찰이 야기되었고,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 운운하는 것
은 비양심적이라고 주장했다
.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
서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있었다.
이북에서는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교
장으로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고신파가 탄생되었다. 1951년 장로교회는
고신파를 정죄하고 고신파는 한국교회 전통을 자처하게 되었다.
신학사상의 차이로 인한 분열은 기독교장로회(기장)와 대한예수교장로회(예
장)의 분열일 것이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와 한국교회 지도자들
의 세계적인 신학적 입장의 무지로 인하여 생긴 것이었다. 1920년대 박형룡
박사는 근대 보수신학의 대표자인 메이쳔에게서 사사받은 신학자로서 한국교
회를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캐나다 선
교사들)이나 이들로부터 배운 지도자들은 신학적인 입장이 아주 자유로웠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로 김재준 박사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
들 간에 신학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35년 단권 성경주석인 감리교
의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인 아빙돈 단권 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했
다는 이유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 한경직, 채필근이 문제가 되었
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 없음을 설
명하였고, 장로교 총회는 주석의 열람을 금지하는 결정을 하였다.
또 평양신학교가 무기한 휴교하게 되자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에서 조선
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1949년 남부 총회가 결성되어 총회 직영으로 조
선신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 김재준은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
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51명의 학생들이 자유주의자라고 총
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고,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를 능욕했다고
평가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 김재준 교수를 파면, 조선신학교의 직
영을 취소하려고 했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기독교장로회라고 하였다.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은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AE)라는 보
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하며, 세계교회
협의회(WCC)를 용공이라고 생각했다. 제44차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이후, 1959
년 합동측 총회를 승동교회에서 결성했고, 1960년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하여 통합측이라 하였다.
우리 교단은 본래 교단을 하나 더 세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합신과의 관
계에 있어서 합동측 안에 직영신학교와 인준신학교의 운영상태를 원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한국장로교는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치적, 붕당
성, 배타성, 국내외적인 선교정책의 문제성 그리고 신학적인 상이성, 이해부
족이나 편협성 등등이 분열의 배경과 원인이 되었다.
우리 교단은 주로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 사실이
지만, 그 근본적인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거나 교단으로서 특별한 사명이 없
다면 다른 교단과 연합을 모색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으로 더욱 더 발전
시켜 나아가야 할 사명이 있다.
4) 정치적인 면에서 깨끗했다.
우리 교단의 정말 좋은 점과 자랑거리가 있다면 정치적 배격이었을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총회장이 되려고 부정한 행동이나 금품을 살포한 적이 없
다. 다 사양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총회장이 되기도 하고 총회 일을 맡
아 수고하는 분위기였다. 지방색이나
교권을 쟁취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
다. 파벌의식도 거의 없다.
총회 소집 선언문의 서문 중에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인위적 및 사상
적 요인들의 작용으로 인해 총회가 거듭 분열하는 비극을 경험해 왔고, 그
이후 장로교회 합동측 교단이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며 성장하여 오던
중,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장로회 헌법을 부재 상태로 몰아넣음으로 말미암
아 교단이 무질서와 불법과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는 사분오열의 상처를 입
게 되었다’라고 했다.
우리는 합동측에서 교단의 교권주의자들이 교단은 물론 신학교까지 장악하려
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세워져서 교단의 정치가 개입되지 않는 건전한 교단
으로 발전되어 왔지만, 정치를 너무 모르거나 잘못한 결과로 총회 때마다 소
모전이 많았고 지루하며 진부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것에 얽매여
많은 토론을 해 오면서 결과적으로는 교단발전에 손해를 끼치거나 발전보다
는 퇴보적인 상태에 떨어지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별히 우리 총회의 큰
약점은 인물란이라고 생각된다.
교회는 정치도 잘 해야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정치적인 개혁도 했다. 반드
시 교리
적인 것만 종교개혁의 대상은 아니었다. 교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개혁을 추구하고 결단을 해야 한다.
5) 개혁주의 사상과 신학을 연구한 목회자들을 배출하려고 했다.
총회 소집 선언문 중 여섯 번째가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소망
이 바른 신학교육에 있음을 재인식하고, 교회와 사회의 여망에 부응하는 유
능하고 수준 높은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힘쓴다(딤후2:1-2)’라고 되어 있
다.
신학교육이 초창기에는 소수정예화의 성격이 상당히 강했다. 우리 교단과 인
준 관계에 있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유일한 신학교이다. 흔히 우리 교단
의 자랑은 신문과 신학교라고 말한다.
약칭 합신대학원의 설립 이념을 보면 1980년 11월 11일에 개교하여 ‘개혁주
의 신학에 근거한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교육이념으로 하여,
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함을 설립목적으로 한다.
바른 신학이란 칼빈주의 신학(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의미하며 성경의 객관
적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롬 11:36)을 높이는 신학을 의미한다.
바른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
체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와 주인(엡 2:22)임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는
교회를 의미한다.
바른 생활이란 신앙과 윤리가 일치한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
며(마 16:24) 한국교회가 상실한 내적인 성결과 겸손으로 주님의 사람을 닮
아 가는 생활을 의미한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등 3대 개혁이념의 구현을 통하여 개혁주
의 신학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를 세우며, 신앙
과 윤리가 일치하는 경건 생활을 정착시키는 일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설립이념이다’라고 되어 있다.
합신대학원은 25년 동안 나름대로 한국교회와 교단에 공헌한 바가 크다. 그
러나 우리 교단은 장로교의 원리에 입각한 신학교, 우리 교단이 원하는 사람
을 배출하는 직영신학교를 가져야 한다.
신학교는 교단(교회)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금까지 인준관계라서 정치적인
개입은 적었지만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개혁주의적인 신앙원리에
입각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선발 과정
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역현장과 총회나 노회의 관리 소홀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6) 연합운동이다.
적은 교단이라도 연합운동에는 적극적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한국기독
교총연합회나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에서 두각을 드러
내고 있다. 그런데 협력하는 연합은 잘하는데 우리 교단의 성격이 약간은 배
타성이 강해서 교단과의 연합은 단 한 번의 연합이 있었을 뿐이다. 총회 소
집 선언문에 ‘화목과 합동운동’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7) 적극적 문화관과 세계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별히 선교에 있어서는 다른 교단에 비하여 상당히 앞장서서 헌신하고 봉사
하는 상황이다. 2006년 5월 현재 총회선교사가 23개국에 73명이 파송되어 헌
신하고 있고, 협력선교사가 19개국에 38명이 헌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교단적으로 개척교회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교단 전체의
균형발전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