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정암신학강좌
“정암신학의 배경으로서의 화란신학”
장해경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서 론
정암(正岩) 박윤선 박사가 별세한(1988년) 후 매년 개최되어 온 이 신학강좌
는 올해(2004년)로 제16회를 맞았고, 그 큰 주제를 “정암신학의 역사적 배
경”으로 정하였다. 정암의 신학을 형성한 배경으로서는 보통 평양 장로회신학
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그리고 화란 개혁파 신학 등의 세 가지를 들
고 있다.
필자는 본론에서 먼저 정암이 ‘화란유학 이전’까지 어떤 교육과정을 밟아왔
고, 그가 처음에 어떻게 화란신학에 관심을 갖고 접촉하게 되었으며 화란신학
과 그의 관계는 누구를 통해 어떻게 깊어졌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는 정암의 짧은 ‘화란유학’ 생활의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보도할 것이다. 마
지막으로 정암의 저서들, 특히 그의 신약주석에 나타나는 화란신학자들의 언
급 및 인용의 통계 자료를 분석하여 그 결과를 제
시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본
론에서 서술하고 분석한 내용을 요약한 후, 정암신학의 배경으로서 화란신학
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숙고해 볼 것이다.
1. 화란 유학 이전까지
정암이 언제 처음 화란(the Netherlands/Holland)의 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갖
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화란어를 공
부하기 시작한 때는 첫 번째 미국 유학시기(1934-36년)였다. 웨스트민스터에
서 여러 고전어 코스를 수강하면서 정암은 많은 화란 신학서적을 읽게 되었
다.
제1차 웨스트민스터 유학을 떠날 때부터 정암의 목표는 신약학자이며 그 학교
의 학장이었던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 밑에서 ‘성경 원어’를 연구
하는 것이었다. 메이천은 박윤선을 따뜻하게 대했고 자상하게 지도하였다. 단
순한 지도교수 이상으로 동양인 제자와 가까운 교제를 나누었으며 학문과 신
앙이 조화된 인격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936년 8월 신약학 석사과정(Th.M.)을 마치고 귀국한 정암은 평양 장로회신학
교에서 성경원어 강사로 약 2년간 일하였다. 그와 동시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표준성경주
석』편집부에서 일하면서 고린도후서 주석을 집필하며 기
고하였다.
그리고 정암은 ‘성경원어’와 ‘변증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는 그의 은사 메이천이 타계하고(1937년) 없
었다. 거기서 그는 1년 여 동안(1939년 10월까지) 머물면서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혼자 연구하며 논문 쓰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
이 시기에 정암이 이수했던 과목들을 훑어보면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첫
째, 그는 이번에도 신·구약성경 주석을 쓰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성경언어 연
구에 치중하였고, 둘째, 신학적으로는 특별히 반 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변증학을 연구하였다.
정암은 귀국한 후 반 틸의 변증학을 사용하여 신정통주의와 동양종교를 위시
한 모든 비기독교 철학과 종교를 논박하였다. 처음에는 반 틸의 인식론이 그
에게 바르트의 ‘신신학’을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 흥미를 끌었으나, 점차로
모든 비기독교 사상과 신학들을 비평적으로 조망하며 성경의 계시를 해석하
는 근본 관점이 되었던 것이다.
제2차 웨스트민스터 유학에서 정암
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반 틸에게서 “진정
한 기독교적 유신론/계시관”을 배운 것이었다. 이 수확은 1938-39년에 반 틸
의 지도 아래 “위기신학”이란 제목으로 변증학 소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얻게
되었다. 반 틸의 인식론적 원리는 그 후 정암의 주석작업과 성경신학에 근간
을 형성하였다.
조직신학자로서 “반 틸의 주된 [사상적] 원천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였다”는 사실과, 반 틸이 프린스턴 학창시절에 그와 같은 화란계 이
민출신인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가까운 친구”였다는 사실을 상
기하면 정암이 왜 이 두 화란 신학자들을 그토록 신뢰하며 의존하였는지 쉽
게 납득이 간다.
2. 화란 자유대학에서의 유학
정암은 1953년 10월,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Vrije Universitet)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만 48세
의 나이에 굳이 생소한 북유럽을 택하여 공부하려 했던 목적은 그가 20년 가
까이 책들을 통해서만 알고 흠모해온 개혁신학자들의 본향을 찾아가 뿌리깊
은 칼빈주의 신학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체험하려는 것이었
다.
자유대학에 머무는 동안 정암의 신분은 정식으로 등록된 학생이 아니라 “지도
교수의 인도에 따라 독자적으로 연구하는 특별학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항상 그러했듯이 최선을 다해 학업에
정진하였다. 거기서 그는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서적들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폭넓고 깊이 있게 탐독하였을 것이다.
온갖 어려운 환경을 굳건한 자세로 맞서 끝까지 결실을 거두려고 했던 정암
의 화란 유학은 그의 아내가 돌연히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중단되었
고, 1954년 3월에 귀국하였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머문 기간은 불과
반 년이 채 안되기 때문에 이 기간에 그의 학문이 어떤 결정적인 진보와 성과
를 이루었다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화란 유학이 아니었더라면 신·구약 주석 저술에 진리를 깨닫는데 부
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라는 정암 자신의 평가를 존중한다면, 이 짧은 화란
방문이 그의 이전 주석작업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그 작업을 보다 풍요롭
게 함으로써 “매우 유익한 것”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별히 그는
화란 개혁자들의 원전을 직
접 읽고 사용한 최초의 한국 학자로서 당대 신학
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로써 정암에게 외국 유학의
기회가 완전히 끝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퍽 아쉬
운 일이다.
비록 정암은 이 때 화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 실패하였으나, 그
로부터 꼭 20년 후(1979년), 그의 가슴에 개혁주의 신학을 아로새겨 준 모교
웨스트민스터는 필생에 걸쳐 신·구약성경주석 완간이라는 전대미문의 위업
을 달성한 그의 ‘학문적’ 공헌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머리에 ‘명예박사’의 관
을 씌워 주었다. 그 날에 정암은 “한국 목회자들을 위하여 학문적으로 뛰어
난 한국어 성경 주석을 저술한” 인물로 소개되었고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업
적을 남긴 성서학자”로 인정받았다.
3. 정암의 저서들에 언급된 화란신학자들
정암의 신약주석 전질에서 학자 및 주석가들의 이름은 성경본문 해석과 관련
하여 총 2888회 언급되었다. 그 중에서 화란신학자들의 언급횟수는 총 834회
로서 전체의 28.9%에 달한다 (Calvin은 총 221회, 7.7%). 그러나 전체 총계에
서 Calvin 한
사람을 제외시켜 놓고 보면, 다른 나라 학자들(1833회)과 화란
학자들(834회)의 언급 비율은1:0.45가 된다. 네덜란드 한 나라의 비율이 동서
양을 망라한 모든 다른 나라들의 거의 절반을 점유하는 사실은 지나친 편중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암 신학에 있어서 화란신학은 그만큼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화란학자 의존도’가 가장 높은 책은 요한계시록으로서 총계(348회)의 46.6%
(162회)이며, 기타 나라들(182회)과의 비율도 1:0.89까지 상승한다. 두 번째
가 히브리·공동서신으로 총계(307회)의 30.9%(95회)이며 다른 나라들(170회)
과의 비율은 1:0.56이 된다. 그 다음이 공관복음이며 해당 백분율과 비율은
30.8%, 0.46:1이다. 그 반면에, 화란학자 의존도가 제일 낮은 책은 로마서로
서 18.8%와 0.26:1, 그 다음이 고린도전·후서로 21:4%와 0.29:1이다.
정암이 그의 신약주석에서 화란학자들을 ‘인용’한 전체 횟수(383회)를 ‘언
급’한 전체 횟수(834회)로 나누면 전체 평균 비율은 0.46이 나온다. 각 학자
별 ‘인용비율'(인용횟수÷언급횟수)을 산출해보면, 대개 언급횟수가 18회 미
만으로 낮은 학자들에게 인용비
율이 높게 나타난다(최고는 Smilde[0.93]와
Wielenga[0.92]). 언급횟수가 18회 이상인 아홉 학자들의 인용비율을 내림차
순으로 꼽으면 다음과 같다: Vos(0.72), Bavinck(0.68), Schilder(0.57),
Grosheide(0.43), Ridderbos(0.40), Kuyper(0.379), Greijdanus(0.377), Van
Leeuwen(0.171), Bouma(0.167). 이들 중에서 전체의 평균 비율(0.46)을 넘는
학자들은 Vos(0.72), Bavinck(0.68), Schilder(0.57) 세 사람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Bavinck와 Schilder의 무게를 의식하게 되는 동시에 Vos
도 언급횟수가 주석에서는 매우 낮지만(8위, 18회),『성경신학』(2위, 17회)
과『교리학』(5위, 8회)에서 상승한 점을 함께 감안할 때 정암이 다른 학자들
보다 더 기꺼이 수용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암은 그의 주석들에서 당시 화란 개혁주의 학자들을 긍정적으
로 언급하고 인용하며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정암이 그들의 견해를 비판
하거나 거부한 경우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런 드문 예들은 그가 그렇
게 존중하고 높이 평가했던 화란신학자들을 결코 예속적으로 맹종하지 않았다
는 증거가 된다.
결 론
한글 신·구약성경 주석을 최초로(1979년) 완필하였던 주경신학자 정암(正
岩)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접목시
킨 인물이기도 하다. 교회사와 신학사에 오래 남을 이 두 가지 업적은 창조주
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뛰어난 언어능력, 끊임없는 탐구력,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와 성경주석 사역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이 한데 어우러져 결실한 희귀한
열매였다.
2004년 현재 지구상에서 우리가 신뢰하며 도입할 수 있는 개혁주의 신학은 어
디에 남아있는가? 얼른 머리 속에 떠오르는 곳이 없다. 서양교회는 전반적으
로 세속화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 사상으로 인해 복음적인 신학이 이
미 오래 전에 퇴색하였다.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개혁주의 교회가 가장 왕성
한 드문 나라에 속한다. 우리는 20세기의 서양교회와 신학이 걸어간 길을 그
대로 따라가선 안 된다.
오히려 한국 개혁교회의 복음적 신학과 신앙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발전시
키고 성숙시켜야 한다. 이 나라 곳곳에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뿌리
를 박고 세워지도록 전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참신한 개혁주의
전통을
21세기 세계교회와 신학계에 역수출함으로써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
다.
이 비전은 정암의 후진인 우리들에게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불가피한 사명으
로 인식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실로 이 역사적 도전 앞에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서양 비평신학의 방법론적 문제를 제거하
고 한국의 독특한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의 방법론과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
다.
과거에 서구학자들의 저서를 그대로 번역해 도입했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교
회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우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믿음과 삶의 자리에
서 임상적으로 검증된 신학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앞으로는 신·구약성경
각 부분을 세부전공으로 연구한 정암의 후진들이 그가 자신의 전권 주석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많은 내용들을 보충하며 심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