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정암신학강좌  박윤선 박사의 변증학 고찰_정승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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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정암신학강좌 

박윤선 박사의 변증학 고찰
–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 개념을 중심으로 –

정승원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1. 서론 

필자는 정암 박윤선 박사의 변증학을 그의 ‘계시의존사색’의 개념을 중심으
로 분석, 평가하고 수정, 보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 작업은 정암이 지양
(止揚)했던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교수의 전제주의적
(presuppositional) 변증학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지면의 한계로 정암의 긍정
적인 평가는 가능한 한 생략하고 비판적 평가에 초점을 맞췄다. 비판적 평가
도 그의 ‘계시의존사색’ 개념에 한정하였다. 사실 비판적 평가라 할지라도 
정암 자신이 고수했던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바로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차원이
므로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바람직한 개혁신학의 발전은 비판적 평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특
별히 박윤선 박사는 변증학자가 아니라 성
경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주경신학
과 성경신학과는 달리 그의 변증학에는 비판적 평가의 여지가 들어 있다고 하
겠다. 또한 비판적 지적이나 평가는 결코 그의 변증학이 성경적이 아니라든
지 개혁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 논문을 통해서 
박윤선 박사가 변증학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개혁주
의적이기를 힘썼는지 확인될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평생을 반위적(反位的, antithetical) 상황에서 살았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참배 문제, 20세기 초반 미국 북장로교와 프린스
턴 신학교에 도사리고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 한국의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자
유주의 신학, 프린스턴에서 분리 된지 얼마 안 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의 미국 유학 생활, 바르트 신학의 팽배, 한국 교회의 교권주의 등은 박윤선 
박사가 변증학에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특히 성경신학자였던 그로서는 주경만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유지하
고 전승할 수 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왜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지, 왜 성경만이 바른 신학의 대상이 되는지, 왜 성경이 모든 지
식과 삶의 기
준이 되는지, 왜 고등 비평이 잘못된 것인지, 왜 현대주의 운동이 잘못된 것
인지 등에 대한 답을 얻지 않고서는 그의 주경과 성경신학을 확고히 이룰 수
가 없었을 것이다.

2. 본론

1)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
박윤선 박사의 변증학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용어는 ‘계시의존사색’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시의존사색”이란 문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
수였던 밴틸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이 밴틸 교수의 “하나님을 따
라서 하나님의 사고를 사색하는 것”(Thinking God’s thoughts after Him)의 
개념, 즉 ‘계시의존사색’이란 밴틸의 ‘유추적 사색’(Analogical 
thinking)으로도 표현된다. 
여기 밴틸이 말하는 “인간이 자신의 체계를 세움에 있어서”라는 말은 총체
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 체계란 세계관, 혹 삶의 철학, 혹 신념으로 이
해될 수 있다. 즉 우리의 존재, 지식, 삶의 모습 모든 것을 좌우하는 체계인 
것이다. 이러한 체계를 세움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가 주장하는 계시의존사색이란 바로 이러한 변증학적 

리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은 그 계시 없이는 어떤 
바른 지식도 얻을 수 없고 바로 살 수 조차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단순히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방편으로만 그치
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존재 양식이기도 하며 바른 인식의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알려지
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계시의 인도함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정암의 ‘계시의존사색’ 개념에서 그 ‘계시’의 범위와 밴틸의 ‘하
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고를 사색한다’는 주장에서 ‘하나님의 사고’
(God’s thoughts)의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암에게서 그 계시란 성경에 
국한 된 것이요 밴틸에게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다 포함된 것이다. 정암
은 “하나님은 오직 계시 의존 사색에 의해서만 사람에게 알려지신다. 계시 
의존사색은 다른 것이 아니고 성경적 사색이다”라고 말한다. 
밴틸은 늘 모든 지식의 궁극적 참조점(reference-point)은 성경이라고 주장하
지만 그렇다고 일반계시가 무시된 의미가 아니라 일반계
시의 참조점 역시 성
경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지식과 삶의 궁극적 기준이요 절대적 권위이
기 때문에 ‘계시의존사색’에서 그 계시를 성경으로 요약할 수는 있지만 만
약 정암이 그 계시를 일반계시가 제외된 개념으로 성경을 말한다면 밴틸이 의
도하는 바와 다른 것이다. 
밴틸은 “모든 피조 된 실재(reality)는 내재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계
시한다”라고 말한다. 여기 피조 된 모든 실재란 단지 성경 안의 내용만을 의
미하지는 않는다. 자연, 인간, 문화, 역사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하
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는 성경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
이 절대적 기준이요 모든 지식의 원리를 담고 있지만 실재의 일반적 지식 없
이는 성경의 역할이 제한되는 것이다. 성경의 역할이 제한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의 충분성과 권위 역시 제한되는 것이다. 

2)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밴틸의 유추적 지식(analogical knowledge) 혹은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
의 사고를 사색하는 것”에 있어서 일반 계시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되
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사실들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서 해석된 사실이고 계시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반 계시가 하나님
의 해석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인간이 그 일반 계시적 요소들을 해석하는 것
은 유추적 지식이 아니라 자율적 지식이 된다. 
물론 죄로 인해서 일반 계시의 역할이 무뎌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
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즉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게 되었다(롬 1:20-21). 또
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섭리 가운데 특별 계시, 즉 성경을 허
락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반 계시가 일반 계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 것이 아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일반 계시가 있었고 또한 특별 계시가 아담에
게 주어졌다. 죄로 인하여서 변한 것은 인간이지 계시 자체가 아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둘의 목적과 역할이 다르겠지만 둘 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밴틸은 “특별 계시의 필요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일반 계시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문제는 인간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밴틸과는 다르게 박윤선 박사는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의 계시성을 애써 약
화시키고 있다. 인간의 죄성 혹은 부패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의 타락 이후 그 자연은 자연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이 부패한 인간에
게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로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
다. 
이러한 주장은 밴틸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이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란 사람의 종교성을 의미하지 않고 자연계 자체를 가리킨다”라는 정암의 주
장에서 그가 의미하는 그 ‘종교성’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가 의
미하는 바는 자연을 통하여 갖게 되는 ‘신의식’(sensus deitatis)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신의식’ 하면 칼빈이 주장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
라 지음 받은 인간 안에 담겨진 일종의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다. 
그런데 정암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은 종교성이 아니고 단
지 자연적 계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연적 계시라는 정의 자체가 불투명하
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 자신도 자연에 속하는 것이다. 일반계시에는 
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종교성이 다 포함된다. 자연 계시와 인간의 종교성은 
분리할 수 없다. 혹 자연적 계시가 인간에 어떤 계시적 역할을 못하고 자연 
자체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계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계시에 대한 밴틸과 박윤선 박사의 입장은 둘 다 특별계시(성경)의 우선
성과 절대성을 강조했다는 차원에서 보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에게 특별계시(성경)는 궁극적 지식의 참조점(reference-
point)이다. 인간의 타락 전에도 특별계시가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더욱 더 
특별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계시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특별계시는 구원을 위한 하
나님의 특별한 계시였다.
박윤선 박사와 밴틸은 성경만이 모든 것을 바로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
다. 이것이 계시의존사색의 핵심이다. 그러나 정암은 성경을 모르는 불신자들
이 자연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실들을 바로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정암의 계시의존사색
은 바로 밴틸의 변증학의 핵심을 이해하
고 다룬 것이며 성경적 가르침이지만 
그 계시의 범위에 일반계시를 제외시킨 것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물론 특별계시(성경)를 보는 것은 두 사람 다 일치한다. 그러나 일반계시의 
관점의 차이는 성경관에는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성경의 적용과 권위의 범위
와 의미는 다를 수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박윤선 박사가 위에서 논한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잘 부각시켰더라면 성경의 위대성과 권위가 그의 학문에
서 더 크게 증거 되고 드러났으리라 생각한다.

3. 결론

본 논문에서는 주로 박윤선 박사의 변증학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루었다. 그러
나 그의 긍정적인 변증학의 가르침은 많이 다루지는 못했지만 정암은 전반적
으로 전제주의 변증학을 잘 이해하였고 또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밴
틸 교수의 영향아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 특히 칼 바르트의 신학을 정
통하였고 또 적나라하게 그들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계
시의존사색의 중요성을 일찍이 갈파하여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큰 이
바지를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단지 신앙적, 영적 영역에만 적용되
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 존재와 인식에까지 다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개
혁주의 신학에 핵심이 되어야 할 주장인 것이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두 세대(two aeons), 즉 이전 시대와 새로
운 시대가 혼합되어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즉 종말론적(eschatological)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두 세대의 구분은 자칫 잘못하면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
의 구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종말론적 반위(antithesis)로 ‘옛 사람’
과 ‘새 사람’의 구분을 기준 삼아 일반계시를 옛 세대, 특별 계시를 새 세
대에 국한시킬 수가 있다. 어떤 이유로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반위적 수용
은 오히려 특별계시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동시에 존재했고 또 지금
의 시대도 그렇고 훗날 천국에 가서도 그럴 것이다. 천국의 어떤 상급의 방편
이나 대상이나 찬양의 방편이나 (예를 들어, 생명나무와 성도들의 찬양), 천
사나 성도들 자신 등이 일반계시라면 성삼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과 교제
는 특별계시라 할 수 있다.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인간의 상황 따라 구별
되고 차별될 수 없는 것이다. 단 하나
님의 섭리에 따라 각기 다른 목적을 갖
고 주어지는 것이다. 
‘계시의존사색’에서 그 하나님의 계시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자연과 인간)
를 다 포함했을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의 우선성과 궁극적 기준이 된다는 사실
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이 자연과 인간, 즉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절대적 기준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부각될 것이다. 그랬을 
때에 성경 말씀의 권위가 더 세워지며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주되
심이 더 확실하게 증거 될 것이다. 끝으로 박윤선 박사의 개혁주의적 변증학
의 전통이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