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집>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
심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 삼위
일체를 증거한 사건이며, 우리의 죄를 구속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사건이며,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리게 한 사건
이었다. 이에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현대 교회
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를 본지에 게재한다.
본 원고는 이정석 교수의 신학연구 홈페이지 http://jsrhee.hihome.com에서
필자의 허락을 받아 가져왔다/편집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핵심적 실체이다. 실로, 예수님을 제외한다면 기독
교는 약화되고 결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가 기독교의 유일한 존재이유
(raison d’etr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소외되고 있
다면 이는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가 처음 세상에 왔을 때 그는 자기 백성으로부터 소외를 받았다(요
1.9-12). 그러나, 그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룩한 인류의 구원
으로 인해 예수님은 많은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으며, 그들은 자타
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접어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와 자기 백성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현상
이 다시 발생하고 있다.
소외(疏外, alienation)란 철학적 용어로서 비인간화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
들이 자기나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기 보다 이념이나 물질의 관점에서 보게 되
면 자기를 상실하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비인간화는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와 연관된다. 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소외는 과거의 소외와 달리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
처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거부하는 실천적 소외라는데 자
기 기만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교다원론적 소외
서구교회가 계몽주의라는 반기독교 운동에 의해 처절하
게 무너져 내리면서 그
리스도는 서구사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소외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세속화에 동조하여 시대정신에 타협적인 자유주의가 발생하였
고, 그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단지 그의 윤리적 이상과
종교적 의식만을 취한 채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멀리 소외시켰다. 이러한
19세기의 구자유주의가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운동에 의해 퇴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20세기 후반 그보다 더 과격한 신자유주의가 발생하여 심지어 사신
신학까지 부르짖었다.
20세기말에 부상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배경으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는 신학이 기독교 안에서 발생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 포스트모
더니즘은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의 해체를 주장하며 절대진리와 절대
윤리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라는 데카당스적
시대정신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야 될 기독교 안에서 오히려 세속정신에 도취
하여 다원주의 사상으로 기독교를 역복음화 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다원주
의 운동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본질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리
스도를 기독교에
서 추방 혹은 소외시키지 않고서는 기독교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소외시킨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인 존 힉의 방법으로,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도
중심적 종교에서 신중심적 종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코페
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자찬하였다. 다른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근본적인 거침이 되지만, 신개념은 대부분
의 종교에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후원을 위해 개발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대표자 존 콥의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일반화시키고 익명화 함으
로서 유일한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는 희석전략이다. 그는 그리스
도라는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유대인 예수는 수많은 그리
스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도 각기 그들의 그리스도가 있다
고 주장하고 그런 그리스도들을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고 불
렀으며, 칼 라너는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라고 규정하였다. 실로 그리스도의 익명화는 비인격화이며, 그리스도의 우주
화는 추상화이다. 왜냐하면 과정신학에서는 심지어 예수가 하나의 그리스도
가 된 것도 단지 범재신론적 진화 과정에서 비인격적인 로고스에 많은 영향
을 받은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한국의 진보적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신앙을 상실
한 채 이러한 서구의 세속화신학에 영향을 받아 종교다원주의운동을 전개하
고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종교간 평화주의와 상대적 다원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에 힘을 얻어 사
명감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으나, 이는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이념에 도취하여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하고 그를 자기 중심에서 소외시키는 행위
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부 지성인들은 이것이 마치 현대기독교의 지배
적 신학인 것처럼 오해하여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를 아류로 비방하고 있는 실
정이다.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소외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해 서로 결별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로
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왔을 때, 유대인들
은 그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아브라
함 이후 2천년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왔으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
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들어보
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장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유
일신론(monotheism)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인식되어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한 분 외에 그의 외아들 예
수님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나아가 또 한 분, 즉 성령님이 더 계신
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관에 존재하는
근본적 차이인 것이다. 이제 성육신과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완전
히 계시된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두 세 분이며, 그 중 한 분이라도 믿지 않으
면 안 되었다.
구약시대에 잘 모를 때는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믿었지만, 성자와 성령이 계
시된 상황에서 구약시대의 제한된 신관만을 고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례나 축도와 같은 공식적 구문에는 반드시 세 분
이 함께 언급되었
다. 그러나, 일부는 끝까지 이를 수용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세 모
습으로 변형하여 나타난 것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고, 이들은 양태론
(modalism)으로 규정되어 이단으로 출교되었다.
한편, 세 분의 관계에 대하여 완전한 신성을 근거로 한 평등성을 부정하고 아
리우스와 같이 서로 다른 종류와 등급의 신들로 이해한 삼신론(tritheism)도
이단으로 출교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은 세 분
(three Persons)이지만 세 하나님(three Gods)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세 분의 이질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올바른
신관이 후에 ‘같은 본질을 가진 세 분의 하나님(three persons in one
nature)’을 고백하는 삼위일체론으로 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론에 대한 혼동이 계속되고 있는 것
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 분이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거나 ‘세 분이 한 분이
다’라는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논리적인 말을 하면서, 신비라서 잘 모른
다고 무책임하게 얼버무리는 어설픈 신학자들로 인해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은
몽롱하고 모호한 신관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한 분인지 세 분인지를 질문하면 목회자들이
반반으로 나뉘는 어처구니없는 실정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분인지
다른 분인지를 질문하면 다른 분이라고 선뜻 대답해 놓고 나서, 그러면 세 분
이 아니냐고 하면 대답을 주저한다.
그리스도의 세례 기사를 보든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성부를 향해 기도한
사실을 보면 성부와 성자가 다른 인격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하나
님이 한 분(one person)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사실상 유대교나 이슬람교
와 같은 입장을 취하거나 양태론적 이해를 하여 고대 같으면 이단으로 규정되
었을 사상이 오히려 동등한 세 분을 모두 믿는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이
라고 공격하는 현실은 현대의 혼란된 신학적 실상을 반영한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신학적 혼란 없이 단순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을 모두 믿고 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
세 분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소외를 결과한다. 먼
저 분명한 인격적 주체가 설정되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가 불가
능하기 때문이
다. 예를 들어 어떤 아버지와 아들을 한 분, 즉 같은 분으로 혼동한다면 그
아버지나 아들과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
과 더불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하고
주님으로 섬기며 교제할 수 있는 독자적 인격으로 믿지 않고, 모호하게 한
분 하나님의 색다른 모습이나 기능 정도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에게 가려지고 혼돈되어 자기가 구원한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소외를 당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정통적인 교회가 한결같이 세 분을 믿는 삼위일체론
(trinitarianism)을 고백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일위일체론(uniterianism)이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승천한 예수님이 성령으
로 모습을 바꾸어 내려왔다고 하여 두 분만을 믿는 이위일체론
(binitarianism)도 대두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예배론적 소외
삼위일체론의 확립은 자연히 예배론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에게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세 분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성부와 함께 성자와 성령도 예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론
적으로는 거의 모든 신조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부를 왕으로 세 분을 서열화하는 군왕적 삼위일체론(monarchianism)
과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계급주의(hierarchicalism) 사고
는 예배의 대상을 성부로 집중하고 사실상 성자와 성령은 거의 소외되도록 만
들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예배적 소외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축도에서 발견되는 삼위의 균형이 예배 전체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모든 인류
가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배의 중요한
의미가 프로스쿤네오, 즉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서 소외된다면 이는 실로 기독교 예배의 근본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있어서 오로지 성부만이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제한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 마지막에 한 마디 언급
될 뿐 성도들이 자기의 주님인 그리스도에게 직접 기도하는 것이 어린이들을
제외하고는 금지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직접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
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따라서, 스데반은 순교 당하
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고, 사도 바울도 자
신의 병고침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 물론, 주기도가 기도의 패턴이 되
었기 때문에 성부가 기도의 주된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예수님
이 지상에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몸소 경험한 분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돕기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우
리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말할 수 없고 항상 성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주장인지 모른다. 오리
겐으로부터 시작된 이 금지장치는 그리스도를 기도와 예배의 중심에서 소외시
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찬송에서는 그리스도나 성령에게 직접 간구하
는 가사들이 허용되고 있는 것은 실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론적 소외
r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교회로부터 주권을 상실하고 주변으
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상 자
기들의 머리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식적 명목일 뿐,
교회를 섬기라고 믿고 맡겨준 목사가 주인으로 군림하는가 하면 교인들은 민
주주의에 영향을 받아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교인들의 대표라고 자처하는 장
로들이 마치 기업의 소유권같이 교회의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이 오늘의 실상
이다. 많은 교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지시를 받는 수동적이고 순종적
인 몸이 되기를 원치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보한 인력과 재정을 자기
들의 뜻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소외현상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킨
분파주의와 자기영광 추구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교회가 분리되기 전에는 그
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와 주인이었으나, 분리 배후에서 특정인물이나
사상이 분파를 하나로 결속하고 지휘하는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그리스
도는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제2의 주인을 추종하는 교파주의에 이어 교단
주의
는 제3의 주인, 즉 수많은 정치적 보스와 이념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그
리스도의 소외는 심화되었다.
더욱이, 현대의 개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개교회주의는 분파운동
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유기체이며
개교회는 이를 구성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지체는 유기체와의 관계 속에서
만 그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유기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지체는 마
치 몸에서 분리된 팔과 같이 필연적으로 부패와 죽음을 결과한다(요 15.4-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교회주의는 주변의 다른 교회들을 적대시하고 교제와
협력을 부정한 채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설 곳이 없으
며, 자기허영과 영웅숭배가 이를 대치한다. 물론, 그리스도가 설교되고 그리
스도가 표방되지만, 그것은 자기 교회의 영광을 이룩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
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상징적 소외
이러한 그리스도의 도구적 이용은 현대의 많은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
타난다. 기복적 신앙의 추구는 인격적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자기의 형통
과 축복을 위하여 그를 이용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는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인데, 자연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중요하지 않고 그 효능과 편의
성에 치중한다.
그리스도는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인격적 대상이라기보다 축
복의 방편이나 마술적 상징으로 이해된다. 무엇이든지 구하고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라는 주문을 붙이면 모두 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
하는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어야 되고 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신앙에서 신은 자동적 응답기(deus ex machina)
가 된다. 부모를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돈만 받아가려는 아이들과
같이, 이와 같은 신앙구조에서 그리스도는 존중되지 않고 그의 인격은 철저
히 소외당한다.
구원을 면죄부와 천국 입장권 정도로 이해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는 단지 그러한 특권을 값없이 제공한 분으로 인식된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감
사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연합이나 그를 위해 자기를 버리
는 자기 부인은 너무 지나친 요구로 생각되어 사실상 거절된다.
하나님과의 화해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구원의 핵심이며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데도, 인격적 관계와 헌신적 사랑보다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
한 도구로만 수용된다. 그는 우리와 영원한 인격적 교제를 원하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목적 달성의 방편으로 이용한다면, 그리스도는 심각한 인격적 소외
를 당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이나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의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거부한 채, 그로부터 올바른 사고나 도덕만을 배우려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
이며,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화하여 이용하
는 것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불교나 유교는 해탈이나 군자와 같은 이념의 성취에 그 목적이 있
으며, 공자나 석가와의 인격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적 화해의 복음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미 죽어버린 공자나 석가와 달
리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교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속적 사고에서 얼마든지 상징으로 전락할 수 있다. 단군숭배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되는 가상적 인물의 상징인
것
처럼, 그리스도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상
징으로도 이용되었고,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의 상징적 배경으로도 이용되었
다. 많은 제왕들은 자기의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왕관을 쓴 그리스도를 상징
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조건적 사랑하고 헌신하는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부귀와 건강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있다. 상징이 인격과 분리되면 그리스도는 소외된다.
현대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프로그램의 범람이다. 오늘날 대중문화와 조직사
회는 프로그램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회들도 현대인들의 자유
분방하고 통제되지 않는 성향을 제어하고자 교인들을 수많은 제도와 의식과
프로그램의 틀 속에 고정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대개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
도가 실종되고 소외될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완성하여 폐지된 구약의
제사제도나 율법적 장치들을 부활하려는 시도들이 한국교회에서 발생하고 있
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마리의 제물을 한번에 불태워 바치는 번제(
燔祭)로 드린 구약의 일천 번제
의 개념을 그릇되이 이용하여 헌금을 천번(番)드려 소원을 이루게 한다는 일
천 번제 헌금이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는 현실이나 백일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백일 특별기도회는 불교의 공력에 의한 소원성취 사상을 그대
로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무관한 혹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제도와 프로그램들
이 범람할수록 그리스도는 소외된다. 칼빈이 {교회개혁의 필요성}에서 통탄
한 중세교회의 그리스도 소외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모
든 교회가 공개적으로 우상숭배에 오염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리스도 대신
우리가 만든 허상들을 섬기고 있다. 수천의 미신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수
많은 미신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
람들의 마음에서 거의 사라지고, 구원의 희망은 그로부터 공허하고 사소하고
무가치한 의식들로 넘겨졌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정답게 사
랑하고 조건 없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를 회복하
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은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
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
로 섬기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추상적인 사랑이나 정의를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삼
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이웃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상징이나 이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같이 인격
적 실체가 없는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현대교회는 헤아릴 수 없는 신학과 정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어린이
와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모든 면에서 그와의 전인
적이고 심층적이며 헌신적인 교제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