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적統攝的으로 성경을 접하라
< 장창수 목사, 총회선교사 >
“십자가를 중심으로 학문들을 재해석해 주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
통섭(統攝: consilience)은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의 반대이다. 환원주의는 대상을 하위 부분으로 세세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섭은 나눈 것을 다시 합하는 것을 각각 뜻한다. 환원주의의 장점은 부분들을 세세히 알도록 돕지만 단점은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한다. 반면 통섭은 부분들도 보면서 전체를 보도록 돕는다.
16세기 이후 환원주의가 모든 과학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모든 학문들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연결됨이 발견되었다. 학문 간 경계선을 넘나드는 통섭적 과학 방법이 중요해졌다. 당연하지 않은가? 물건을 하나 들 때 손만 일하지 않는다. 손목, 팔, 어깨와 허리의 도움이 요한다. 몸의 한 행위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의 유기적 협력을 요한다. 사고(思考)의 세계에서도 같다.
성경은 통섭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에게 문화사명(창1:28절)을 명했다. 그 목적은 인류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존재로 창조했다. 다시 말해 문화 사명 수행은 종교학, 사회학, 동물학과 자연과학 사이 유기적 협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화 사명은 창조주의 명에 따르며 창조주의 복주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창1:28절). 인간의 영적 영역이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영역의 중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영역들 사이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문화사명(창1:28절) 자체가 이를 잘 증언한다. 이 사명은 내용상 둘로 나뉜다.
첫째,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에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는 땅과 모든 생물들의 통치와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존재로서 이 세상 즉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 전자의 명령은 후자의 명령에 좌우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전자는 인문사회과학에 그리고 후자는 자연과학에 각각 속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문과(文科)와 이과(理科)의 분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역으로 이 둘이 함께 해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학을 과학들과 분리시키는 자세 자체가 처음부터 비성경적이다. 신학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머리는 있는데 수족이 없는 식이 된다. 신학은 모든 과학에 존재의 의미와 목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통섭적 접근이 요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마찬 가지다. 조직신학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이라는 각론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런 구분은 없다. 성경 본문에서 이 각론들은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따라 서로 달리 조합되며 통섭적 가르침 즉 제 일의 가르침을 준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의 주제별 가르침들은 사실상 제 이의 가르침들이다.
성경은 통섭적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환원주의에 의거하여 분해하고 쪼갠 후 제 이의 가르침들을 찾는다. 분명한 것은 후자를 가르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제별 강의와 강연이다. 통섭적 가르침 즉 제 일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다룰 때 신학만으로 부족하다. 신학은 성경 해석을 위한 기초를 제공할 뿐이다.
성경 본문 안에서 신학적 주제들, 즉 제 이의 주제들이 어떤 역사와 문화의 배경 아래 어떻게 문법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피고 성경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제 일의 가르침을 찾아내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사명이다. 당연히 성경도 통섭적 방법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원은 환원주의에 여전히 지배당한다. 성경신학과 교리신학 사이, 신구약 신학 사이, 성경신학과 교리신학과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사이 갈등이 보인다. 자신의 신학적 권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동일한 성경을 다룬다. 갈등보다 협력이 더 필요하다. 자기 영역을 전공한 후 다른 영역을 넘나드는 그런 통섭적 신학 연구가 필요하다.
인생, 삶, 몸, 역사, 인격, 신앙 그리고 구원 등등은 한 부분이 아니라 많은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된 유기체와 같다. 한 분야의 연구나 지식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성경도 같다. 성경은 사람과 사회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학이나 예배만 주장하며 사화과학이나 사회 삶을 무시하는 것은 이미 이원론적이며 이미 비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에서 통섭적 방법이 요한다.
성경 본문이 내용 면에서 통섭적임을 알고 해석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문제는 신학이 다른 학문들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는 유식한 목회자들은 다른 과학들의 도움으로 기독교 신학을 재해석하려 한다. 이것은 신학을 초등학문으로 변환시키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중심으로(고전2:2절) 다른 과학들을 재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이다. 예수님과 그가 성취한 구원은 인류 역사와 사회에 전반적인 갱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들과 과학들을 배우려 함은 그 성향들을 알고 성경의 관점에서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함이다.
독서를 하는 것은 포괄적 안목을 기르기 위함이지 성경 밖에서 설교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통섭적 성경 해석의 의미는 바로 이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