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며 살아나는 잡초의 생명력
<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
“신자라면 짓밟힘 속에서도 경건의 후손을 남기며 생명력 이어가야”
필자가 사는 마을 뒤에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전주(全州)) 이(李)씨 문중(門中) 묘들이 윗 선대 순(順)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벌초하는 조건으로 그 묘에 딸린 밭을 선친의 뒤를 이어 경작하고 있다.
늘 분주한 가운데서도 운동과 묵상(默想)을 위해 묘사이로 난 산책길을 자주 올라 다닌다. 풀들이 힘차게 자라나는 초봄이 지나면서는 우거진 풀 때문에 다니는 길로만 가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면 길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넓은 묘 잔디에 갖가지 잡초들이 섞여서 자라는 중에 유독 길에만 싹을 틔우는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사람 발길이 잦아 밟히는 곳에는 잡초라도 힘을 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분명히 자주 밟고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또 밟지 않는 곳에서는 그 잡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씨앗은 그 주위에서 고루 퍼지며 자라기 때문에 하나를 발견하면 분명히 주위에 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잡초는 길에만 있었다. 이 잡초는 ‘그렁’이라는 이름으로, 잡초 중에서도 아주 강한 ‘강해초’(强害草)로 분류되는 식물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동네 뒷동산에서 놀잇감으로 사용했던 친근한 잡초이기도 하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숲 속 산책길이 나온다. 그 길에는 또 다른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질기고 질겨서 ‘질경이’라 부르는 나물이 발길 닿는 곳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흔히 잡초하면 동물에게 밟혀도 악착같이 살아난다는 관념(觀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식물은 발아(發芽) 자체도 밟아야만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고 잡초들은 다름을 알게 되었다.
잡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근성(根性)과 닮은 점이 많음을 느낀다.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 외세의 침략으로 국토와 민중이 잡초처럼 짓밟힘 당한 것이 무려 960회라고 한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나서 지금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는 말이 있듯이 평화의 시대보다는 국난(國難)의 시기에 많은 위인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밟아야만 새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잡초처럼.
이 자연의 원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이기도 하다. 로마 초대교회나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도 식물로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잡초 중에서도 자생력이 강한 잡초이리라.
작물과 잡초의 차이점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음의 차이이다. 작물은 농부의 보호와 손길로 좋은 조건에서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 재해가 오면 전부 사멸(死滅)하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잡초는 어떠한 자연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싹을 내고 번성하는 강점이 있다. 비록 그 수량이 작더라도 기어이 살아남아 후손을 번식시키는 잡초의 생명력은 척박한 땅이라도 뿌리를 내리고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며 옥토로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창세 이후로 경건한 자손들은 세상 시류(時流)에 물들지 않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순전함을 지킨 자들이다.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엄청난 짓밟힘 속에서도 경건의 후손을 남기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구속의 역사이다. 일반법칙 속에서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두 번 말하면 잔소리이다.
작금(昨今)의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야성(野性)이 사라지고 온실(溫室) 속의 안일한 기독교가 아닌가 하는 근심을 떨칠 수가 없다.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던 잡초 근성은 희미하고, 세상의 힘과 화려함을 좆아 몰리며, 어느덧 기득권층에 안주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자 그에 편승하여 힘을 얻으려는 그 자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양적 팽창은 있을 수 있으나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경건한 후손들은 급감하는 조짐이 이미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진국의 쇠락(衰落)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고난을 자초하지는 않을지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면 피하지 말고 참고 감당하는 것이 내일의 희망이고 복된 일이다.
밟힐수록 더 강하게 일어서는 잡초의 질긴 생명과 관련해 ‘엔도우 슈사’의 ‘침묵’이라는 책에서 성화(聖畵)를 밟는 것을 배교(背敎)로 여기던 신부에게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밟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소외됨을 겁낼 것 없다.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우리는 묵묵히 따를 뿐이다.
아직도 낙후된 농어촌 오지(奧地)나 후진국에 전도자를 필요로 하는 지역은 아주 많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 이리저리 밟혀도 마침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