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신”_김학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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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신”

 

< 김학문 목사, 고양제일교회 >

 

“‘헌신’이라는 말을 할 때는 당연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죽어져야”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헌신’이다. 그런데 자주 사용하다보니 그 참뜻을 모르고 막연하게 알고 쓰는 듯하다.

 

흔히 ‘헌신예배’라고 하면서 단지 예배 순서를 주관하고는 헌신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교회나 선교에 있어서 물질을 내어놓고는 교회를 위해 혹은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사전에서 말하는 헌신에 대한 정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다. 단지 마음을 기울이고 애를 쓰는 정신적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바치되,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성경은 더 정확하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인 소나 양을 죽여 각을 뜨며 내장을 전부 쏟아 내버리고 불에 태우곤 했다. 그래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헌신이라는 용어가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해서 그 의미를 예배, 즉 구약 제사와 관련해서 이해하도록 한다.

 

그 전형은 사도 바울에게서 엿볼 수 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고 했던 사도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고 했다.

 

‘전제’라는 말은 ‘스펜도’(σπενδω)라는 말로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인데, 구약의 제물과 같이 온전히 주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 3:17)고 하면서 헌신은 진정 자기 목숨을 복음을 위해 다 내어놓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헌신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 말을 쓰는 것으로나 마음을 기울이고 물질적인 것을 내놓는 정도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자기 자신을 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이라는 말을 할 때는 당연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러나 헌신한다고 실제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죽지도 않으면서 죽어야 한다고, 또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헌신 예배’ 혹은 ‘헌신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헌신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고 추상적인 이해로 쓰고 있다.

 

물론 헌신한다고 우리는 구약의 제물처럼 실제로 죽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롬 3:25). 히브리서 10:10-14에서는 이것을 보다 분명히 제시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매일 서서 섬겨야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앉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온전히 다 받으셨다는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까지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사를 반복하실 필요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헌신은 필요치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 이심을,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편에서 준비한 제물 이삭은 거부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받으셨다(창 22:1-14).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오래전 모세에게 계시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행 3:22-23).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한마디로 헌신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교회에서 헌신을 말할 때, 물질을 내놓은 정도나 시간을 드리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한 성도의 헌신은 자기 자신을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복하여 사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순종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보여야 할 헌신이다(요 15:7-10).

 

요즘같이 교계가 혼탁한 시대가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열정에, 교회의 본질보다는 성장에 쉽게 눈이 어두워지고 있다. 교권 쟁탈전으로 치달아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롱과 멸시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온전한 헌신이다. 그와 같은 헌신의 참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