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니까…
장인선 집사(시인, 염광교회)
나는 지금 많이 행복하다. 아마 내 나이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내 분수
를 알고 긍정적인 생각이고 그 때서야 지금처럼 모든 일에 “만고 땡 여
사”가 된 것 같다. 그 전에는 많이 힘들고 불평이 많고 불행했다.
나는 가난한 집에 막내딸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몸이 너무 약해서 항상 아
팠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공부 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학교만
잘 졸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공부하러 학교 가는 것이 아
니라 출석만 하고 학교 다니는 것만도 내 건강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내 별
명이 “비 사이로 막가”였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내가 너무 말라서 비가 오면 그 사이로 내가 막 지나가
는 것과 같다고 해서 그 별명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공부도 못하고 당연히
대학은 못 갔다. 그 결과 변변한 직장 생활도 못하고 25살에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으로도 많이 미안하지만 그 때의 남편을 사랑하
지 않았
다. 지금도 “잘난 척”을 무지하지만 그 때도 엄청 “잘난 척”을 했나
보다. 옛날 남편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
다. 그러나 그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그 때 주정할 때 단 한가
지 주제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였다.
나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주님께 정말
큰 “죄”를 지었다. 그래서 “식물 인간”으로 1달을 살고 겨우 의식이 깨어서
친정으로 왔다. 그 때부터 사람들의 구박이 시작되었다.
그 때 나는 “엄마!”소리도 못해서 나는 분명히 한국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서 언니와 엄마가 내 표정을 보고 통역을 해야 했다. 그리고 글
씨는 대학 노트 4분의1이 내 글씨 하나였다. 또 대소변도 못 가리고 먹을
때 음식은 있는 대로 흘리고 걸음은 중심을 못 잡아 뒤뚱거리고 걷고 그러니
사람들은 내가 정상인으로 보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의식은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바보”취급했다.
엄마는 “너 보다 시집 못 간 애도 잘만 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하셨
고 언니는 “안 보면 불쌍하고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같이
있던 조카들은 “바보” 이모라고 밥도 같이 안 먹으려고 했다. 나는 정말 많
이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내 손에 “성경”이 항상 있었다. 그 때 쓴
글이다.
고난
축복의 샘인 고난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봅니다
정금을 만들기 위해 치는
주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백합을 보며 주님의 오묘한 솜씨를
생각합니다
언젠가 마리아에게서 난 향기가
제게서 나길 바라며
오늘도 주님을 따릅니다
지금도 이 글을 외우면서 많이 은혜를 받는다. 내가 쓴 글이지만 나에게 많
은 위로를 주고 힘을 준다. 아마 주님이 나를 긍휼히 보셔서 글 쓰는 은사
를 주신 것 같다.
지금은 정말 행복하다. 20대에는 너무 힘들었고 30대 초반에는 사람들과 비
교하느라 불행했고 30대 중반부터 “자족”하는 믿음과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지금은 나 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 같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