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자리에서 읽어야 한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마이클 고힌|IVP|2009년|
“자기 위치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추상적 읽기에 불과해”
나는 굿이나 제사나 시주를 해본 적도 없다. 무속이나 유교나 불교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는 배웠지만 그것도 나의 전통은 되지 못했다.
증조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내 삶은 그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 진리를 확인하며 예까지 왔다. 전통은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배우고 확인해 가게 하는 삶의 울타리다.
물론 나의 기독교 전통은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박고 있다. 성경은 일반 인문학 책도 아니요 과학책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가 부어주시는 모든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성경은 역사, 시, 도덕 교훈, 신학, 위로를 주는 약속, 인생을 지도하는 원리와 명령 등을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기나긴 구속의 행로를 가시는 하나님의 여정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서 한결같이 그리고 점진적으로 펼치시는 활동의 드라마다.”
이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책을 읽다 ‘아, 이거로구나’ 하고 찾아낸 게 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경을 읽자.’ 이제까지 알아온 방법 중에 이 방법이 최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추상적 읽기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헛 읽는다는 소리다.
이 책은 ‘자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요한 세 가지 강조점 가운데 하나다. ‘총체성’과 ‘자리’와 ‘선교’(혹은 사명)라는 개념이 그것들이다. 총체성이라 함은 창조, 죄, 구속이라는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을 말한다. 자리라 함은 성경 이야기 안에서 신자 각자가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선교라 함은 이스라엘이든 교회든 선교적 사명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신약교회가 출범한 이래 우리는 다 ‘중간기’(in-between)에 서 있는 자들이다.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시기,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낀 시기에 서 있다. 이를 의식하든 못 하든 우리는 이 자리에 서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이 중간기는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 성령, 교회가 선교를 감당하는 시기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가 서 있었던 자리도 있었고, 오순절 이래 수많은 신자들이 서서 자신의 삶을 펼쳐온 자리도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동일하지 않고 각각 서로 다른 자리였다. 저자가 성경 이야기를 6막으로 된 드라마라고 비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각각 다 하나의 자리인 셈이다. 즉 창조, 타락, 이스라엘,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누어지는 자리다.
이 중간기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우리는 성경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경을 읽자’라는 생각까지는 떠올렸지만 그게 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고 한동안 막막했다. 이 책의 저자도 도무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 방법이 뭘까 궁금해 하던 차에 구약의 역대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성경학자들은 역대기가 그때까지 전개된 구속의 드라마를 포로기의 시각으로 다시 진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구속의 역사를 반추하고 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모색하려고 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다 싶었다.
교회적 선교/사명에 부름 받은 우리로서는 중간기의 시각으로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하리라. 그렇게 할 때 구약을 그리스도가 빠진 유대교처럼 읽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무턱대고 읽어나감으로써 자신의 현실이나 책임과 무관한 메마른 읽기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 읽기는 자신의 기독교 전통을 확인하고 반성하고 확신하며 책임까지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