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3)| 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심판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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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심판  이사야 6:9-12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가 있을 뿐”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무서운 심판은 회개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심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그 심판 선언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이 둔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선지자가 두려움에 차서 물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망해버릴 때까지”였습니다.

 

못된 짓을 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아무 일이 없이 여전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잘 풀리고 있다고 좋아하면서 간증을 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착각하고 오히려 사람 앞에서 더 교만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더 방자해지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오히려 잘 풀리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큰 거침이 되고, 하나님께 항변이 되는 사람들이 성경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시편 73편의 기자가 그러했고,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일관된 대답은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시며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다시 가죽 채찍을 휘두르시고 강단을 뒤 엎으시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분노할 만한 교회로 만들어 놓고도, 교회가 크게 부흥한다고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돈 거래를 하면서 교회연합기관의 단체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회개의 몸짓은 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온갖 비난과 욕설을 감당해내는 것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그런 일이 드러나면 즉각 그 자리를 떠나고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이 세상이 지켜온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교계의 지도자라면서 일 없다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일반 신자나 교회들에도 전혀 고와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뻔뻔하고 가증한 모습으로 비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교회가 도덕적으로 세상만도 못하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정상적인 교단들이 모두 이단이라고 판정지은 교파와 합하여 한통속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도 이를 지적하는 여러 비판에도 옴짝 않고 버티는 것은 관용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거룩한 모습하고는 턱없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모두가 넘어지기도 하고, 미혹을 못 이겨내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본성이 부정한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범한 잘못과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에는 실패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연약함의 영역을 넘어, 악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것에 대하여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돌이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범죄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범행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래서 회개도 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사울이 그러다가 망했고, 가룟 유다가 그렇게 망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도 범하지 않는 중죄를 범한 다윗은 죽지도 않았고,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과 죄를 짓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사울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고, 다윗처럼 납작 엎드려 고백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아합이나 그의 아들 아하시야, 그리고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고, 베드로처럼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고 돌이키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것은 죄라고 하는데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여전히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법으로 일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모두가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본인만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주신 증거라고 간증거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그가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