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한(恨)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흔히 한(恨)은 여성의 대표적인 정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
나 최근 들어 한의 정서가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지적이 잇따르
고 있습니다. 한 많은 남자들이 늘어간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한은 주로 부모
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서, 아내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그리고
일과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 어느 여성 사회학
자의 분석입니다.
한이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상당수 남성들은 불안한 미래와 직장생
활의 스트레스 때문에 어깨가 쳐져 있습니다. 이들은 IMF 환란이 남긴 사회경
제적 여진의 영향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오륙도(五六
盜)’라는 신조어가 ‘사오정(四五停)’, ‘육이오(六二五)’, ‘삼팔선(三八선)’으
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이태백(二太白)’이란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과장된 표
현이기는 하지만 당사자들의 당혹감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통계에 의하면, ‘만일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현재의 배우자를 선택하겠는가?’ 라는 질문
에, 남자는 40%, 여자는 10%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확인하지 마십시오!) 통계의 추세는 남자가 의존적이 되어가는 반면 여자는
독립적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서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각
광받는 직업들은 여성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종전에 남성이 자랑하
던 힘과 용기는 기계나 로봇이 대신하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대신 여
성이 자랑하는 감성과 섬세함과 적응력은 현대사회가 높이 사는 덕목입니다.
이 때문인지 요즘 TV 연속극 등에서도 남녀의 전통적인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
가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산율감소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사교육비의 과중한 부담은 소중한 보
배인 자녀를 무거운 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조기유학 때문에 때 이른 ‘빈
둥지’와 ‘기러기 아빠’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렵게 졸업한 자녀들도 직장
을 구하지 못해 ‘캥거
루 족’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 세대’ 중에 자
신은 부모에게 힘들여 효도하지만, 자식의 효도나 안정적인 노후대책을 기대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소 희화화된 남성의 푸념에 대해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장부의 이름’을
떨치려는 꿈은 제쳐놓더라도, 좋은 아버지, 인정받는 남편, 유능한 상사가 되
려는 소박한 (사실은 야심 찬) 꿈까지 접으려는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소망
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거나 상심한 마음 때
문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서 신앙적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복고는 해답이 아닙니다. ‘옛날이 좋았지’ 라는 탄식으로 얻는 유익은 하나
도 없습니다. 보다 철저한 가부장적 권위, 남성중심적 질서의 회복, 그리고
홀로 가정을 책임지는 고독한 영웅상의 강조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복고적 가치는 성경적 진리도 아닙니다. 시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굽
이쳐 흐릅니다. 변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
로 보는 것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불신
앙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입각한 지혜로운 대응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남성성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남성성에 대
한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고 성경적인 남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
회입니다. 무엇보다 비현실적인 허상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자리를
찾는 일이 시급합니다. 체면치레보다 실질을 추구하고, 외적인 성공보다 지속
적인 자기개발과 영적 충실에 힘써야 합니다. 남성성의 회복은 곧 여성성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아내를 공주처럼 살게 해야 멋진 남편이라는 설화의 거품
을 걷어내야 합니다. 아내는 외로운 공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인생
의 동반자입니다. 아내는 교회생활에, 남편은 직장생활에 주력하는 이상한 분
업도 리더쉽의 원칙에 따라 조정되어야 합니다. 남성성을 여성성과 더불어 하
나님의 선물로 인식하고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한 많은 남자가 믿음의 장부
가 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