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증거
성주진 교수/ 합신 신약신학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은혜는 거의 모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듯 합
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은 후나 신앙적인 모임 또는 활동에 참여한
다음에 우리는 흔히 서로 은혜를 받은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총평을 대신하기
도 합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이다 보니 과연 이 은혜가 어떤 은혜인
지, 과연 무엇이 은혜가 되었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분
이 좋아지고 감정이 고조되는 것만으로도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상투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은혜라는 단어
의 진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
다.
진정한 은혜의 의미는 그 반대개념인 ‘값싼 은혜’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어구는 원래 독일 신학자 본 훼퍼가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
n성과 영향력상실의 원인을 ‘교회가 값싼 은혜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라고 진
단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진 표현입니다. 그에게 있어 값싼 은혜는 진정한 은혜
의 자리에서 일탈한 상태입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의 대표적인 예로 회개 없는 죄사함, 참된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 진정한 교제가 없는 성찬, 십자가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
도, 그리고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들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도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는 ‘값
싼 은혜’를 받은 것뿐입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는 하나님의 축복을 갈구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희생도 치
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받되 부담 없
이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
하는 방식으로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생각과 태
도와 관계에서 종전의 입장을 고집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진정한 은혜는 ‘값싼 은혜’의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진정한 은혜는 참된 회개, 참된 신앙고백, 하나님
과의 진정한 교제, 십자
가를 지는 삶, 기꺼이 희생하려는 태도, 그리고 변화된 생활을 포함할 것입니
다. 이러한 특징들은 요즈음 통용되는 은혜라는 말의 피상성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물론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여호수
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 공략을 앞
두고 여호수아를 만나주십니다. 그분은 아무 조건 없이 여호수아를 만나 주시
지만 일단 만난 후에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만일 여호수아
가 신을 벗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
다고 주장하고, 그분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을 거
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입니다. 신발을 벗은 사람, 곧 하나님의 명
령을 따라 그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람만이 ‘은혜다운’ 은혜를 소유한 사람입
니다.
값싼 은혜와 관련하여 신약에서 오해되는 말씀 가운데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
에 이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 대한 전인적인 믿음이 없이
그저 말로 동의를 표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오해되기도 합니
r
다. 그러나 이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으
로 믿는’ 사실의 외형적인 표현입니다. 또 당시 상황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
은 어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한 전인격적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피상적인 고
백과는 거리가 멉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가 우려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의지의 변화가 은혜 받은
증거로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감정적, 지적 변화를 당연히
포함하지만 인격의 중심인 의지의 변화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
정은 고조되어도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성경지식은 날마다 늘어나도 자신
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과 성화가 별개로 취급
되고, 신앙의 고백과 사랑의 실천이 불연속선을 이루며, 은혜와 윤리가 접점
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과 세상에 대한 의지의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주목하고 추구해야 할 은혜의 증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