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 공연한 성탄절 연극
추둘란_수필가,홍동밀알교회
“체면과 수줍음 떨치고 어린아이처럼 열연하셔”
한순례 권사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미끄러지신 바람에 엉덩이뼈를 다쳐
서 수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병실에 들어선 우리를 보자 권사님은 두 눈
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래 사람에게도 늘 존대를 하는 당신 특유의 어투에
는 반가움을 넘어 두터운 사랑과 정이 묻어났습니다.
반가움으로 병문안 맞이하신 권사님
“아니,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어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늙은이
가 몰골에다 이런 못난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 바쁜
분들이 이렇게 늙은이를 찾아왔으니….”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으나 눈빛만으로도 그동안 우리들을 향하여 얼마나
큰 그리움을 안고 계셨는지 다 느껴졌습니다. 권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함께
섬기고 사랑하며 지내다가 아드님이 목회하는 홍광교회로 서너 해 전에 이사
를 하셨습니다. 자주 찾아뵙는다 하면서도 마
음처럼 찾아뵙지 못한 것이 늘
송구하였습니다.
수술을 하고 사흘 동안 금식까지 하셨다는 데 기력이 그다지 약해 보이지 않
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아니, 핼쑥해지신 겉모습과는 달리 목소리는 얼마나
씩씩하고 쾌활한지,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오히려 문병 온 사람들
을 격려하고도 남았습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씀이 사뭇 떠올라 감동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밀알교회, 밀알교회 하시더니 아주 기운이 펄펄 나시네요. 내일
퇴원해도 되겠어요.” 병실을 지키고 계신 홍광교회 홍석기 집사님도 아이처
럼 즐거워하는 권사님을 보며 농담을 건네었습니다.
“내가 홍동밀알교회에 신세만 졌지. 그 신세를 어떻게 다 갚아요? 하나님
이 아시니 다 갚아주실 거예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권사님의 모습은 비가 오나 눈이 오
나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모습과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던 모습
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서는 “늙은이가 화장
실 청소나 하지 달리 할 일이 뭐 있어요?” 하시며 추운 겨울에 수도가 얼
어 오물이 내려가지 않는 화
장실을 말끔하게 치워놓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 속에는 한 가지 모습이 더 남아 있습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이었습니다. 대개 성탄절 발표회는 주일 학교 아이들 몫이었는데 그해에
는 온 성도들이 함께 발표회를 하자고 목사님이 제안하였습니다. 칠순, 팔
순 되는 어르신들이 그것도 점잖은 충청도 양반들이 발표회라니 수줍고 음전
한 분들이라 사양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젓
거나 손사래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색을 하며 행복하게 연습을 하였
습니다. 캐럴에 맞춰 촛불 춤을 추는 분들, 수화로 복음송을 부르는 학생
들, 개그맨 마냥 빨간 장갑을 끼고 빨간 티를 입고 나와 좌중을 웃기는 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우리 구역이었으므로 함께 연극을 하였습니다. 변사 역할을 맡은
나와 미진 엄마가 해설과 대사를 읽으면 구역원들이 무언극 마냥 제스처로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 무대에는 네 살이 되었으나 아직 ‘엄마, 아빠’밖
에 말할 줄 모르는 민서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권사님의 부군
이신 홍 집사님도
계셨습니다.
그날의 연기는 얌전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엎어지고 구르고 기어야 하
는 연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도, 홍 집사님도 체면을 내세우거나 수
줍음을 내세우지 않으며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열연을 펼쳤습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순종을 읽었습니다. 충청도 어르신들 특유의 “아이구, 모
뎌유” 하는 겸양을 가장한 불순종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자리에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너나없이 예수님 앞에
서 아이들이 되어 상기된 얼굴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연기를 하였습니
다. 누구보다 먼저 순종하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솔선수범하신 권사님이 계셨
기에 그해의 발표회가 더 은혜로웠는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면 도로 어린아이가 된다고들 합니다. 아이처럼 육신도 작아지고
마음도 아이 같아져서 작은 일에 노여워하고 작은 일에 즐거워합니다. 한때
논밭에서 일하느라 거칠고 딱딱했을 손은 아이의 손처럼 다시 힘이 빠지고
부드럽게 됩니다. 심지어 즐겨 찾으시는 옷도 분홍색이나 빨간색같이 아이들
이 좋아하는 색깔로 바뀌게 되고 먹는 것도 딱딱한 것은 더 이상 드시지
못
합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는 말씀은 믿음과 마음의 중심뿐
아니라 그렇게 육신과 취향까지도 아이들 같아지는 때를 말함이 아닌가 싶습
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지만, 성도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는 권사님의 얼굴에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해맑은 아이의 얼굴을 읽
었습니다.
길지 않은 면회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눈빛을 나누고 따스하게 손을 마주 잡
아주는 그 순간에 육친의 정보다 더 뜨거운 정이 솟아올라 내 눈에는 어느
새 감사의 눈물이 고였습니다. 한 아버지를 모시는 천국 백성이어서 감사했
고 권사님 같은 귀한 분을 가까이 있게 해 주셔서 믿음의 본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믿음으로 보인 본에 눈물 글썽거려져
부디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셔서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하고 성탄절을 준비
하는 권사님의 모습을 뵙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