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석포에서 온 편지
달콤한 칡꽃 향기를 맡으면서
김영자 사모_채석포교회
창문을 여니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보랏빛 칡꽃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히 밀려옵니다. 창 너머 빈터에 가득 피어난 칡꽃은 뜨거운 여름
의 오후를 한가롭게 만들어 주는 여유를 맛보게 합니다.
유난히 달콤한 칡꽃 향기
마당 한쪽에 손바닥만하게 만들어 놓은 텃밭이 있습니다. 고추, 오이, 가
지, 도라지, 토마토, 완두콩 등이 제법 자라서 끼니때마다 찬거리를 제공합
니다. 그런데 마구 자란 칡넝쿨이 어느 사이에 무성해져서 텃밭에까지 줄기
를 뻗어 나의 작은 오이, 토마토, 고추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달콤한 꽃향기로 나에게 작은 행복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칡꽃이 피는 여름 이맘때면 아이들은 방학을 하고 어김없이 여름 성경학교
가 열립니다. 우리나라 모든 농촌의 현실이 그렇듯이 이곳 채석포 역시 젊은
이들은 도회지로 나가고 나이든 어른들만 남았습니다.
아울러서 이웃 초등학
교는 가르칠 어린이가 없어서 폐교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예닐
곱 명의 주일학교 아이들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전에는 30여명이 있었지만
7,8년 사이에 이렇게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곳의 아이들
은 거의 부부가 헤어진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아이들이 때로는 교회에 오면
서 울기도 합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합니다. 부
모님의 사랑이 그리운 아이들은 교회에서도 정서가 안정되지 못하여 울기도
하고 주의가 산만하여 소리 지르기도 하고 마구 뛰어 다니기도 합니다. 주일
학교나 중등부에는 교사가 없으며, 어린이 주일학교는 중학교 1, 2학년 여학
생이 보조교사를 합니다.
오후에는 중학생 몇 명과 성경학교를 하는데 배고프다고 손수 라면을 끓여주
기도 합니다. 귀찮기도 하련마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재미있어 합니다. 이유
를 물어보면 그래도 나에게 배우려는 아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합
니다. 가까운 면 소재지에는 그래도 규모가 있는 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찾아오니 감사하고 반갑고
보배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함께 모여 하룻밤을 자면서 마치 언니처럼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머
리도 땋아주고, 라면 국물도 한 모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
을 쌓아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모든 교회를
지켜가는 청지기가 될 것을 꿈꾸어 봅니다.
이 아이들로 인해 속도 많이 상하지만 반면에 기쁨도 누리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오후부터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뛰어와서
함께 예배당에 가보자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니 깜짝 놀
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배당 안이 풍선으로 장식되었고, 하얀 칠판에는 ‘목사님 생신을 축하합니
다’라는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사연인 즉 목사님이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
서는 순간 폭죽이 터지면서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오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
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푼돈을 모아서 최신식(?) 자크 넥타이를 선물하
고, 아주 작은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꼬맹이 전부 편지를 한 통씩 써서
읽어주는 이벤트가 열린 것입니다.
편지에는 목사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내용과 더불어서 성경공부 시간
에 목사
님 속을 애태우게 했던 잘못된 일들을 반성하는 글과 교회를 사랑하는 글들
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말썽만 부리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속이 들어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이중에는 6학년인데도 전혀 말을 못하는 아이가 글을 써서 자기 표현을 하
는 글도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헤어져서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는 도희와
은희 자매, 엄마가 집을 나가 고모 집에서 동생과 함께 지내는 가람이, 마
치 귀찮았던 칡넝쿨이 보랏빛 꽃과 달콤한 향내를 내뿜어 무더운 여름날의
한 때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이 아이들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목사님과 차를 함께 타고 다니면서 자기들의 속내를 전부 이야기한
답니다. 심지어 “너 첫 사랑 해 보았느냐?”는 등 남자 친구 이야기라든지
학교 이야기라든지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데 때로는 내가 무안할 때가
있을 정도입니다. 목사님이 오빠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부모
님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오히려 샘이 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린이
주일학교나 중등부 학생들 모두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육
십이 되어서
도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남편 된 목사님이 감사하기도 하고 어
린 아이들이 고맙기도 합니다.
귀찮았던 칡넝쿨이 기쁨과 향기를 선물하듯이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 같은
아이들이 이렇게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것을 보면서 “어린 아이와 같지 아
니하면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주위
에 우리의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
해 봅니다.
칡넝쿨처럼 귀찮다고만 생각하고서 멀리 내치지는 않았는지, 쉽고 편한 자리
만 찾아서 앉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울고 있을지
도 모르는 우리 아이들입니다.
어머니 품속 그리는 아이들
이들이 자라서 저들의 바람대로 좋은 꿈나무가 되어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
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교회 식당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을지도 모르
는 남편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