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정설/ 나누며섬기는교회
‘평안하세요!’
상대가 기독교인일 경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실의
에 빠져있거나 고민거리로 마음이 번잡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평안하라’고 이야기할 때, 반대로 누군가에게 ‘난 평안해’라고 이야기
할 때 ‘평안’은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걸까요? 심신의 안락한 상태,
혹은 ‘사건이나 상황이 순조롭게 잘 해결됨’ 정도만 의미한다면 그리스도
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차
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평안’이란 신자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를 확신할 때 생기는 것으로서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누려야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려운 상황 앞에서 심신이 고달프고 마음이 뒤숭숭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 신앙을 자라게 만드시
는 하나님에 대한 신
뢰와 세상 끝 날까지 나를 견인하신다는 그 분의 약속을 믿는 백성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 오르는 평안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들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닥쳐도 평안을 이미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
다.
가끔은 자신이 뭘 시도해도 그 일의 결과가 썩 좋지 않고, 뭘 해도 실수연발
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
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게 되고 그 모든 일은
잊어버립니다. 이 즈음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을 ‘참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뭔가 많이 부족
해 보입니다.
우리는 위와 같이 원망->평정->감사(혹은 망각이나 무덤덤함)라는 감정의 순
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이 찾아올 때 실패와 실수,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적극적으로 따져보면 어떨까요? 나의 잘못된 습관과 행동이 문제였을
수 있고, 정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문제가 원인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매 여름의 폭풍우 앞에서 ‘하
나님께서 노하셨다’->‘하나님께서 일상을 되찾게 해주셨다’->‘고마우신
분이다’ 정도에서 그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폭
풍우 속에서 자연의 흐름을 읽고 주께서 주신 질서와 규칙을 발견합니다. 가
끔 이 질서가 흐트러질 때 영향을 주고받는 요인들은 어떤 것들인지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하나님
에 대해, 주께서 주신 자연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을 더욱 적극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누리게 되는 은혜도
더욱 풍성해집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사건은 우리에게 그냥 무심코, 재수 없이(?) 주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을 고난에 빠뜨리실 때, 사탄을 이용하시거나 사
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욥기 1장 참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고난들은 쓸 데 없거나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들
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쁠 때나 슬플 때
나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