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의 목회편지(98)
딤전 5:17(c)
존경하려는 마음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하교시간에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한 무리가 소란을 피우며 우 몰려와 마
을버스를 탄다. 버스기사는 출발시간이 지체되자 아이들에게 꾸물거리지 말
고 빨리 타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을 한다. 몇몇 여학생이 버스에 올
라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버스기사에게 들으라는 듯이 입에 올리기에도 민
망할 정도로 심한 욕지거리를 해댄다.
막말하는 사람들 많아
언뜻 보기에도 버스기사는 여학생들에게 아버지뻘이나 될 것 같은데. 차안
에 있는 어른들 가운데 누구도 나서지 않고, 심지어 버스기사조차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너무나 분이 난다는 표시로 차를 험하게 출
발시킨다. 이제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
었다.
존경상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회적인 큰 문제들 가운
데 선두에 속하는 문제이다. 존경이란 꼭 윗사람
에게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
다. 물론 윗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온 노인들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 된
다.
자기의 분야에서, 그것이 특수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최선을 다하여 전문
가가 된 사람은 정말로 존경스럽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학문이나 예체
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니
다. 무엇보다도 교사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에게라도 그렇게 큰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다. 게다가 어느덧 시간은 흘러 심지어 목사까지 존경하지 않는 때가 되었
다. 목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사 자신에게 원인이 있
다. 신앙과 인격과 생활에서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목사
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느새
신자들마저도 존경을 상실한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
게 표현하자면 신자들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
적일 뿐이라는
상대화의 정신에 오염되었다.
사도 바울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
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존경을 상실한
시대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로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말속에는 사
람들이 장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존경의 조
건은 대상에도 관련되지만 주체에도 관련된다.
존경받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존경하려고 해도 그 대상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존경할 수 없듯이, 아무리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도 존경
하지 않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그래서 존경의 대상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듯
이, 존경의 주체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존경하려는 마음, 존경을 표현하려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오래
전 정암 박윤선 박사는 신학교에서 때때로 새파랗게 젊은 목사들이 설교를
해도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받아 적으면서 아멘을 연발하곤 했다. 목사들
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며 정암이 무식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언
젠가 우리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설교하
는 목사는 무조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며, 목사의 설교는 무조건 존경받을만
한 것이다!
정암이 설교학 시간에 우리의 습작 설교에 보여준 예리한 비판은 아직도 가
슴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그
렇게 난도질하는 정암의 설교비판 앞에 머리를 숙인 까닭은 그가 설교자에
대하여 평소에 보여준 진심 어린 존경 때문이었다.
존경스런 모습 남긴 ‘정암’
그렇다. 비판은 나중이고 존경이 먼저다. 존경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
을 표현할 자격이 없다. 존경이 빠진 비판은 악마적인 것이다. 존경을 상실
한 상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씩 수치가 증가하는 매연에 오염
되듯이 시대정신에 오염되어 존경하려는 마음을 점점 뒤로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을 앞에 점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