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 해설
계시
슐라이어막허에게는 경험 혹은 감정이 신학의 궁극적 기준이다. 이것이 바
로 그가 말하는 계시의 형태이다. 계시란 어떤 개념 혹은 문장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또한 계시는 직접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면 받는자에 의해 한 번 걸
러야 하는 것이계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계시는 객관적으로 주어지
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계시는 어떤 외부
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내적으로 받아지지 않는 것은 결코 나에게 계시가
될 수없다고 한다. 이런차원에서 슐라이어막허는 성경을 종교(기독교)의 감정
을 말로 표현한 인간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
가 있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막허는 기독교 신
학은 성경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교리는 받아들
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 고백서를 받아들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의미하는바는 자율적으로 해석되는 ‘종교적 감정’
(Geful)이다. 다른 것은 (성경, 고백) 그 감정을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상징
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
슐라이어막허에게 죄란 역사속에서 어떤 특정한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죄요, 종교적 감정에 반대되는 것이 죄
라고 한다. 인간의 영생이나 영벌이 한 사람의 한 순간의 결정에 의해 정해진
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 단계에서는 영적으
로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생물학적 지적인 발달이 영적 도
덕적 발달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런 차이에서 죄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죄
란 선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죄가 존재해도 인간의 근본적
선은 계속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남 다른 ‘종교적 감정’(Geful)을 가졌었다고 한다. 비
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성경의 교리에 중요하기는 해도 그
리스도의 인격을 아는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해도 예
수를 믿을 수 있
다고 한다. 그래서 구속이란 그러한 역사적, 외형적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함. 그리고 예수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존
재할 수 없다고 한다.
㈁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단지 모델일뿐 아니라 사람이 필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
어야 하는 모습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
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데
는 실질적으로 죄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결론으로 그리
스도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적 감정을 분석하
는데 있어서 죄가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셨
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 우리의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 함. 그는 말하기를 “구속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
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
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
의 존재이다”라고 말
한다.
은혜
구원의 섭리는 창조의 섭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왜냐면 창조의 섭리
로부터 종교적 의식 (감정)이 가능함에서 현실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한
다. 그러므로 은혜란 단지 인간의 가능성의 발전이요 인간이 거절할 수도 받
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베푸는 구속은 그리스도 가진 하나님-인식
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
㈀ 이성적 자율성의 원리: 비록 슐라이어막허는 기독교를 자율적 이성에
근거를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시를 부정하는 그의 신학은 인간 이성의 자율
성을 의존하고 있다.
㈁ 그는 기독교를 인간의 자율적 감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계시를 떠
나서 인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인 모습
과 합리적이 모습이 동시에 보인다.
㈂ 비록 그는 성경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성경이란 단지 기독교 초창기 문
서로서 (전통)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권위를 두지 않는다.
㈃ 그의 신학에는 하나님/인간, 초월적/내재적 이원론이 나타난다. 하나
님이란 우리가 정하는 어떤 존재라기
보다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나타나
는 감정(Geful)에 발견된다고 한다. 이것은 범신론적 개념이다.
㈄ 그의 신학에는 주체/객체의 이원론도 나타난다. 그는 주관주
의자(subjectivist)이다. 즉 그는 진리 자체 혹은 우리를 떠나서 나타나는
진리를 부정한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
신안에 있는변화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주관주의자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신학
은 그 후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들은 구속의 역사
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것
이 아니라고 말한다.
㈅ 그의 그리스도는 인간 성품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에게서 온 것이다.
㈆ 구속사는 단순히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옮겨감을 느끼는 종교적 감정
의 발전 과정으로 해석된다.
㈇ 그의 신학은 우리(인간)를 떠나서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가르
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나 인간의 능력은 다를 바가 없다.
㈈ 그의 신학은 칸트의 경험적/선험적 세계 이원론에 깊이 근거하고 있
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관계되어야 초월적인 것 (하나님, 구원, 죄, 등)이
존재하고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 경우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
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
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 라는 말씀을 죄로부터의 구
속은 다시금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
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
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말씀한다.
또한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의
형상이시라고 말씀한다. 2절에는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으셨다고 말씀한다.
즉,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바로 그의 형상대로 우
리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가 창조주이
시며 또한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을 하신 구세주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의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적 특징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다시 회복시
킬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거룩한 무리들과의 교제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가졌던 그 교제가 이제 종말
론적으로 새하늘과 새땅에서 회복되며, 그 날을 기다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몸을 세우며 (에덴 동산=교회) 사는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는 정통 신학을 도그마틱한 ‘위로부터의 신학’이라 혹평하
고 계몽주의적 자연신학을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 폄론하면
서 절대의존
의 감정(Gef hl)을 핵심으로 하는 자신의 신학을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진정한 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신학 체계에는 우리가 믿는 계
시관이 들어 갈 자리가 없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신적
계시란 어떤 개념이나 문장으로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모
든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
와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계시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다
는 것이다. 계시는 어떤 외부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내적으로 받
아지지 않는 것은 결코 나에게 계시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어떤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계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는 성경을 한 종교(기독교)의 감정을 말로 표
현한 것으로 본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
으로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 혹은 감정이지 문자로 기록된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내적, 주관적 감정의 표현이라는 차원에
서
슐라이어막허는 성경을 기독교 경전으로 본다. 심지어 성경에서 나오
지 않는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
통 고백서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실 이렇게 고백서에 권위를
두는 것은 성경을 단지 인간의 고백서 정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의미하는 진정한 계시란 자율적으로 해석되는 종교적 ‘감
정'(Gef hl)이라는 것이다. 단지 성경이나 고백서는 그 감정을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절대 의존적 감정의 차원에
두는 것은 사실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에 불과한 것이다. 슐라이어막허 자
신이 비판한 자연주의 신학과 그의 신학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가 말하는 감정이란 영원한 것 혹은 절대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결국 자
신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
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이 직접적으로 의식한다고 그는 주장하지만, 인
간이 그 어떠한 것을 의식한다 해도 그것이 유
한 것이 절대적인 것에 그
리고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결국 자신의 자율적 판단내지는 순간적인 신념일
뿐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감정은 일종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추론
(postulate)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슐라이어막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의미와 신앙적 의미로 나누
어 본다. 먼저 역사적 예수는 남 다른 종교적 ‘감정'(Gef hl)을 가졌었다
고 한다. 또한 비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성경의 교리에
중요하기는 해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
런 것을 알지 못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속이란 그러
한 역사적, 외형적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주장한다. 반
면 그리스도는 단지 모델일뿐 아니라 사람이 필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가 되어야 하는 모습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안에 내재한 가
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과 떨어져서 생각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데는 (감정에서는) 실질적으로 죄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결론으로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적 감정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죄가 없다는 것이
라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구속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
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
재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현대신학자들의 기독관이다)
이러한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의 두가지 큰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지난
호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나타나는 감정
(Gef hl)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범신론적 개념인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에
서 추구하는 신비적 체험 개념이 슐라이어막허의 감정 개념에도 발견된
다는 것이다. 신 혹은 하나님이란 인간이 체험하는 실재 (reality)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그의 강한 주관주의이다. 어
떤 객관적, 역사적 사건은 자신에게
체험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된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구원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를 비롯해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
율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적 사건들을 발생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 혹은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과 관계되어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칸트의 현
상적/본체적 세계의 이원론에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본체적 세계
는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도에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은 그 자신이 기존 정통
신학을 믿지 못함을 인해 감정(Gef hl)과 같은 여러 허구적 개념들을 가
지고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위’와 ‘아래’
를 연결하기는커녕 아래에서 인간 자율성을 중심으로 빙빙도는 소용돌이
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