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의 배경 (1)
정승원 목사/ 예손교회, 합신 교수(조직신학)
현대신학의 학문적, 사회적 배경으로 우리는 17세기 말에서 시작해서 한
세기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들 수 있다. 계몽주
의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교회(구·신교)의 통치와 권위로
부터 나와 인간의 것으로 깨우쳐진(enlightened)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
것은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세계관이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높게 평가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이성’이 ‘계
시’를 대신하였고 자연주의(naturalism)가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를
대신했다는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이 종교적 교리나 계시를 살피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가 전적으로 반(反)기독교적 혹은 반(反)유신론적으
로 시작했으며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
이었으며 유
신론적이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이신론(deism)이 나온 것이다. 신을 인정하
되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
이 다스릴 세계를 허락하고 이제 더 이상 상관하지도 상관할 수도 없는 신
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시보다 이성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겠다
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신론을 기독교내에 존재하면서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고 계시를 부정하는 현대신학자들의 모태(母胎)적 양상(樣相)으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대표적 인물은 아마도 수학자이며 철학자였
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일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
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이성의 우월성을 잘 나타
내 보이는 말이다. 즉,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가를 의심할 때 (여기 데카르
트가 말하는 cogito는 의심 내지는 비판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 의심의 주
체인 인간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이성
(理性)이 인식론적 출발점이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존재론
적 출발점이 되었음을 알리는
말이다. 계몽주의는 이런 사상적 변화뿐만
아니라 과학적 변혁에 의해 그 힘을 한층 더 싣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지
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기존의 중세 시대의
우주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평평한 지구를 중심에 놓고 위에는 천국
이요 밑은 지옥이라고 가르친 교회의 권위는 추락했었다. 이렇게 시작한
과학의 존재는 바로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근거요 인간 이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이다.
19세기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당시 계몽
주의 시대의 과학의 발달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자연
과 자연의 법칙들이 밤 속에 숨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뉴톤
(Newton)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이러한 풍자는 그 당시 사람
들에게 과학의 존재가 어떠했으며 교회가 얼마나 초라해졌는가를 잘 나타
내고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이 인간 문명과 삶의 질에 진보
를 가져왔다고 낙관했을지 모르나, 사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
로 하지 않는 또 다른 암흑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을 인지
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 또한 과학의 작은 발전이 하나님
을 대적하게 된 것은 마치 아버지가 인터넷을 모른다고 아버지 권위 자체
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아이의 행실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
기 초 현대 신학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적합한 환경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율성’(autonomy)이다. 이제는 인간 외에 어떠한 외부의 권위나 기준
에도 순복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자유케 할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최종 준거점 (reference-point)이 되었다는 것이다. Theo-nomy(God-law)
가 아니라 auto-nomy (self-law)가 된 것이다. 둘째로 ‘이성’이다. 물론
헬라 철학 이후부터 시작해서 이성이 중세 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계몽주의의 이성은 주어진 질서와 원리에 부합하는 이성으로만 끝나는 것
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성이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도 다스리는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은 바로 현대신
학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