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다 높은 교회의 윤리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은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 누구나 사변적 방식이나 철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문).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과 교회의 정당한 말씀의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차서가 발생하게 되며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아직 기대할 수 없는 유아적 상태의 성도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유아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의 실체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이교도들이 신봉하는 신들은 사람들의 상상에 따른 산물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과 같이 아직 약한 신자들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교도의 신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개종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신적인 견해들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게 되며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는 죄책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들이 비록 율법주의자이거나 엄격주의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을 약하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모든 기독인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모두 온전한 지식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법을 따르는 실제적인 예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 사랑의 법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제한하는 사랑이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적 사랑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독교적 자유이다.
나보다 연약하고 신앙이나 신학의 지식에 있어 낮은 수준의 형제들을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랑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는 연약한 성도들의 양심을 충동하는 일에 있어서 강한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세속적인 질서나 윤리보다 더 높은 의식을 가지는 교회의 거룩한 윤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