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가벼운 기독교 탈출하기
이창동 감독의‘밀양’을 보고 나서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편집실장
현충일 저녁 식사 때 아내에게 정말로 느닷없는 질문을 하나 했다. “하나님
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정말로 믿어.” 이 오만불손한 질문에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서 믿어”라고 가볍게 응
한다. 이 말에 이어서 나는 “‘밀양’을 본 후 용서라는 주제가 나의 큰 화
두가 되었어”라고 되건넸다.
여전히 신비로운 ‘용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용서라는 주제가 이처럼 심각하게 나에게 말을 걸
어온 적이 없다. 어쩌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너무 익숙한
터였으리라. 이 주제를 놓고 책장들을 지루하게 넘기면서 그 미묘하고 복잡
한 세계를 더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 종교와 심
리학의 만남’(김용희 지음, 책세상), ‘용서와 화해’(웨버렛 워딩턴 지
음, IVP), ‘용서의 미학’(루이스
스미디스 지음, 이레서원)을 통해서 말이
다. 아직도 이 탐험은 진행 중이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밀양’은 아주 정확하게 이 질문을 던진다. 하나
님인가 사람인가. 피해자 신애는 그 주체를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해
자인 유괴 살해범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인가.
그들 모두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처지가 그리 갈라놓은 것인가.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나가 보자. 아들을 살해당한 신애의 고통은 ‘상처받
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를 통해서 어느 일순간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이
평안으로 구역모임에서 간증도 하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전도도 하며 역전에
서 노방 찬양도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
유괴범한테 면회도 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유괴범의 당당한 신앙고백 앞에서 신애의 평
안은 너무나 무력한 것으로 드러난다. 평안한 얼굴로 상대가 “하나님께 회
개하고 용서받으니 이래 편합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라는 말에 신애
는 할 말을 잃는다. 자신 앞에서 정말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자책하는
겸손
한 마음을 보고 싶었을 텐데 웬걸 상대의 말은 그 정반대였다. 이제 신애의
평안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애가 유괴범을 용서하
겠다던 마음도 실은 상대가 스스로 죄책감을 갖고 있기를 바라는 전제를 깐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믿는 기독교가 가볍다 보면 신자의 마음이라도 그렇게 움직이
기 십상이다. 내가 보기에 신애의 평안은 심리적 해소나 옅은 기독교적 평
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신애는 야외 집회로 모인 어느 모임을 찾아가 “거
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대중 가수의 씨디를 몰래 틀어 자신의 평안이
참 평안이 아니었다고 강하게 어필한 게 아닐까. 자신의 거짓 감정에 스스
로 속았다는 분노를 그렇게 대리 분출한 게 아니었을까.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도 실은 따지고 보면 기독교의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가져다주는 결과일 따름이다. 신애가 그리도 비난했던 유괴
범이 받았다는 용서가 도리어 일차적인 것이요 근본적인 것이다. 복음이 주
는 근본적 은혜는 용서이지 마음의 평안이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따지면 유
괴범의 평온함을 아무도 문제삼을 권리는 없다. 신애조차
도 마찬가지다.
이 용서는 신비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남이 볼 수 없도록 마음
의 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 필요할 때만 몰래 자기만 꺼내 보아야 한다. 하
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할 때만 몰래 꺼내보아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외부에
노출된 음식이 금방 상하듯 용서의 신비도 마음 바깥에 내다놓으면 그 맛은
쉽게 변하고 만다. 신애는 유괴범의 고백에서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
다. 이래서 용서의 평안도 상대에게 무례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 가벼운 기독교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어디쯤에 있을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스스로 주술을 걸어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이비 평안
을 발행해 주는 면죄부도 아니다. 대중적 기독교는 복음의 사죄와 의롭다 함
에만 치중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발 더 나가면 성화 대신에 성공을 강조한
다. 이것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복잡한 인생을 통해 성숙해 가야 한다
는 사실을 잊게 하는 데 있다.
용서도 성숙의 과정 필요해
우리의 기독교가 이런 가벼움을 안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할 때이다. 자기 죄
를 용서받음이 타인의 허물을 용서할 근거가 된 아름다운
유산을 남긴 손양
원 목사님이 우리의 역사에도 엄연히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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