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과 인류의 복지
김영규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인류는 하나님 없이 미래의 행복 사회 결코 꿈꿀 수 없어”
영혼 속에 있는 기억의 원형과 비교하여 계속적인 기억 재생을 통해서 우리는 기억 단백질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의식은 항상 일방적이고 제한적이어서 환경과 대화를 통해서 다시 그런 단백질들과 연결이 되고 그렇게 연계될 때에만 그와 같은 단백질들이 서로 연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관리되지 않고 늙어감으로 인해 뇌 세포들 간의 그물망의 유연성은 점차 떨어지게 되고 점점 더 스스로 관리할 수 없게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건강보험시스템이나 의료기관이나 의료인들의 좀 더 적극적이고 더 세심한 서비스의 개선과 혁신에 의해서 개인의 성장과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건강들이 관리될 수 있다면 미래의 행복한 사회로 가는 큰 기반이 형성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단체나 국가가 물질적 행복을 넘어 그런 정신적 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일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지사회로 가면서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빨리 빨리 문화를 바탕으로 국민 총생산량도 늘리고 국민소득도 높일 수 있을지라도 그런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길에는 훨씬 큰 함정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선진국 사회처럼 높은 서비스 사회로 가면서 모든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순수한 노동 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 그 대표적인 함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징후는 소득 증가율에 비해서 높은 부채증가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다른 예로서 사람들 사이에 혐오감을 가진 말이나 행동들에 의해서, 혹은 행복의 조건으로 측정되는 공기 중의 조그만 날 벌레들이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전자파들에 의해서 과거에는 없었던 정신적 장애들이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그런 장애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에 미래의 건강한 사회에 훨씬 심각하고 광범위하게 피해를 줄 것이다.
또한 그런 정신적 장애들을 치료하는 약이나 첨단 의료시설들은 개발하기가 더욱 더 어렵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하는 사회적 비용은 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더 가중되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잔인한 살인 사건은 복지사회가 아직 인간의 행복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는 현대사회와 같이 물질적 행복을 최대로 누리는 상황을 예상하고 주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나 상관없이 율법에는 인간의 궁극적 행복의 조건으로 창조하시고 지금도 계속 선물을 주시는 자로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극히 사랑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행복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그와 같은 명령들만을 포함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본성적 질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 질서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본성적 병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 죽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인류에게 내린 실제적인 형벌 내용에 대해서 아직도 공의를 하나님께서 확고히 쥐고 계신다는 표시이다. 그런 공의를 쥐고 있는 의지가 계속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공의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를 넘어 우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신비로운 비밀이 되고 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혹은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공의에는 놀랍게도 헛된 풍설도 일으키지 말라는 말씀도 있다. 사람에 따라 거짓에 대한 이해 수준들이 각각 다를 수 있겠지만, 인터넷 상에 상대방에게 쉽게 욕을 할 정도라면, 거기에는 정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주신 같은 명령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리 작은 능력이 나에게 있다 해도 그것으로 악한 자들과 짝을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다. 적어도 그런 말씀에 의하면, 세계의 역사 뒤에 하나님께서 그런 공의를 요구하는 자로 역사하고 계신 이상 그런 율법을 어긴 자들은 궁극적으로 이미 패배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가 더 무르익을수록 가장 큰 범죄는 다수에 따라 악을 행하는 일이다(출 23: 2-3). 특별히 권력을 가진 소수들이 범하기 쉬운 일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다수를 동원하여 악을 행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다수에 따라 악을 행하는 일 가운데 다수에 따라 규정되는 법들을 통해서 악을 행하는 일이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악이다. 동시에 그것과 정반대의 양상으로 복지사회가 기반을 두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이 원인이 되어 다수의 연민에 따라 그들을 편벽되이 두호하는 일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을 다 요구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없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극히 불행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회의 조건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실로 어떤 하나님으로 계신가를 알며,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많아야 미래의 행복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은 정직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원리에 따라 정직한 자가 되고자 하는 함정이 그것이다. 즉 정직한 자가 되어 정직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직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이 바로 그 함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 함정에 빠지는 일은 그런 정직을 생산할 수 있는 그릇으로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 비로소 정직한 자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여기까지 발전되어 왔을 때 사람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는 일이 그 사회나 그 구성원들에게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