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개혁 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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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개혁 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교회교육
이철호목사/ 부평강성교회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개혁 총회의 진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청소년들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존
재하는가에 따라 21세기 하나님 나라의 건실한 건설과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
주일학교, 학생회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서 교회의 청
소년들이 자꾸만 교회를 떠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벌써 20년
가까이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날로 침체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해왔고, 또 여러 가지
의 대책이 강구되었으나, 그 현상은 여전히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두 가지로 진단하고자 한다. 첫째는
재미있던 교회가 재미없는 교회로 바뀐 것이요, 둘째는 ‘또래문화’에 젖
r
은 세대들이 교회내에 설 땅이 없다는 것이다.

재미없는 교회
먼저 그 첫째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한국기독교사를 돌이켜 보면 일
찍이 개화기 초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즈음에는 기독교가 우리 나
라의 왕실과 애국단체를 중심으로 큰 일을 감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
사들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비롯하여 국내 주요인사들과 교제를 나누면
서 이 나라의 개화를 직접 도왔으며 또한 왕실은 그들의 선교를 도왔다.
그리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이 겨레에 큰 유익을 가져다 준 것도
바로 기독교였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6.25동란 이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독교의 교세는 굉장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것이 6.25동란 이후 그 선교세력의 중심권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터 양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의 기독교는 날로 성장하는 추세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 이 사회는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때 교회는 일반사회나 공공교육기관에서 쉽게 제공하지 못
하는 문화적
요소들을 많이 제공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특히 젊
은 학생들과 청년층으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음은 사실이다.

주일학교에서 실시한 분반 공부는 헌신된 많은 교사들에 의하여 소수의 소
그룹 교육으로 콩나물 교실의 학교 교육과는 대비가 되었고, TV가 본격적
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70년대 초반 까지는 율동과 융판교재 중심의 시청각
교육과 동화와 찬양, 놀이 등이 있는 교회 교육은 사회 교육기관인 학교나
가정에서 주지 못하던 획기적인 내용이었고 교육시스템이었다.

또한 학생회에서 실시한 문학의 밤과 회지 발간, 그리고 청년들이 주도한
교회의 각종 문화행사 등은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공간과 기회를 갖지 못하던 당시의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좋은 문화적 공간
과 기회와 볼거리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그것은 하나
의 문화적 충격과 문화적 동력으로 이 사회의 문화 발전을 선도하고 있었
다.

그리고 당시 이 사회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해서 젊은 남녀간에
자리를 같이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았으니, 젊은 남녀가 함께 자리를 같이 하여 예배를 드리고 또 예배 후
에 친교의 시간도 가질 수가 있었다. 비록 ‘연애당’이란 말은 들었으나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남녀교제의 기회를 제공한 교회야말로 그 당
시 사회를 계도하고 문화의 질을 높이며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희망을 가져
다준 유일무이한 처소이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교회는 이 사회 어느
곳보다도 더 매력적인 처소요 이 사회 어느 모임보다도 가봄직한 곳이 되
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 사
회는 날로 날로 변화를 거듭하였고 청소년들의 주변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말았다. 5,60년대의 행사나 70년대
의 행사가 똑 같았으며, 7,80년대의 행사나 오늘 90년대의 행사가 그 모양
그대로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분반공부와 율동, 시청각 교육인 융판교재와
슬라이드 상영은 매력적일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문학의 밤’이 청소년
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수 없다. 성탄전야의 각종 행사도 이 사회의 세
련되고 흥미진진한 
행사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2,30년 전과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제는 교회의 청소년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시대가 온 것이
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붙잡아 둘 힘이 없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가 문제가 되
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 멀어진다는 데
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교회 밖으로 뛰쳐나간 청소년들이 세상과 짝하
며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진다는 것을 뜻할 수 밖에 없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은 교회 안으로 불러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재미있는 교회로
우리는 무엇으로 그들을 불러들일 것인가? 아무래도 다시 재미있는 교회로
그들에게 닥아가야만 할 것 같다. 혹자는 교회가 재미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교회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오히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
리는 그 밖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유있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

바울이 가는 곳마다 처한 처지마다 태도를 부드럽게 고쳐가면서 진리의 도
를 전한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9:19-23)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
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
코자 함이니”(22)

이제 청소년들이 최대로 관심을 갖고 있는 문화적 삶에 대하여 교회는 관
심을 가져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감성이 가장 발달할 때다. 즉 문화적 욕구가 가장 왕성할 때
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70년대 한국교회는 청소년들의 이러한 문화적 욕구
를 문학의 밤, 회지 발간, 성탄절 행사 등을 통해 충족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 문화적 욕구가 강한 세대를 향하여 교회는 70년대보다
도 더 퇴보된 상황이다.

‘문학의 밤’도 학교 축전보다는 좀 더 재미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만 청소년들이 교회로 오게 되지,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그들을 교회로 오
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문화교실을 제안한다. 문화 교실은 개 교회 형
편에 맞게 개설할 수 있다. 컴퓨터교실, 미술교실
, 회화교실과 같은 학습교
실과 농구교실, 축구교실과 같은 스포츠교실, 드럼, 기타 등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음악교실 등과 같이 개 교회 형편에 맞는 교실을 한두 가지라도
개설해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평소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제공해 줘야 한다.
이 사회보다 더 앞서서 최첨단의 생각으로 최첨단의 수단을 통해 최고의
프로그램을 개발해 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예전의 기독교문화의
영광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사회를 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를 통해 진리의 도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교회에서도 영상문화의 개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새대의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영상 시스템에 의해 자라났다. 동화도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비디오와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자라났다. 또한 이 사
회는 영상화 되어가며 멀티비전화 되어가고 있다. 기성세대는 문서세대요
듣는 세대였다면 현대의 청소년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세대다. 즉 문화적
욕구가 강한 세대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교통비를 절약하여 빵과 먹을 것을 사먹었다면 이들은
돈을 모아 CD나 테이
프를 사는 세대다.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배
당 건축시 교육관을 설계하면서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영상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음향시스템도 가능하다면 최첨단의 것으로 마
련할 필요가 있다.

본래 구약시대부터 우리 하나님께는 언제나 그 시대 최상의 것이 제물로
드려졌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러한 준비와 노력에 일점의 부정적인 생
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교사 중심의 주입식 교육에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근자에 교회마다 교사
확보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를 아무나
하는 경우가 있어 더욱 교육의 부실을 낳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코너학습’을 시행하는 것이 긍정적일 것이다. 다양
한 교실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참여(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한다.

그 주일의 주제를 설교하고 난 후 각 반으로 나뉘어서 분반공부를 하던 

스템에서 1-2, 3-4, 5-6학년으로 나누어 그 주일의 주제를 한 선생님이 공
과공부를 시킨 후 각 코너별로 학생들 스스로가 참여하는 학습방법이다.
코너는 교회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마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
기방, 만들기방, 연극방, 찬양방, 컴퓨터방, 놀이방 등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각 방마다 그 방의 전문 선생님이 그 날의 주제를 가지고 그
림을 그리게 하고, 만들기(공작, 진흙만들기 등)를 하고, 짧은 연극을 하고,
노래를 하고, 컴퓨터게임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하루에 한 코너에만 들어가게 할 게 아니라, 두세
개의 코너를 거치도록 하여 그 날의 주제를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하게 한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자기의 관심분야 안에서 즐겁게 참여하게
되고 그 날의 주제를 반복 교육함으로써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포츠 시설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레포츠
의 시대이다.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풀기 원하는 청소년들에게 교회는 과
연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신앙심이 깊은 청소년들 뿐 아니라 일반 청소
년들
에게도 레포츠에 대한 욕구는 대단하다. 오늘 그들은 교회내에서 이
필요를 채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의 도를 전하는
데에 있어 그 첫 단계가 아니겠는가?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영적 안식처만
이 아니라, 정신적·육체적 안식처도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내
에 그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레포츠 시설과 휴식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각 교회 나름대로 형편에 따라 얼마간의 공간 확보와
시설 투자가 꼭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교회란 사회보다 앞서가는 교육환경, 그리고 교육의(전도) 대상인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는 의식전환과 과감한 투자, 공간확보를
통해 저들 스스로가 다시 찾을 수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적은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잘 안다. 대단한 재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마음껏 투자할만한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각 교회마다
어려운 형편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는가?

이 시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보다는 우
선 청소년들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교회가 그들을 이해하고 이 일을 위하
여 노력하고 있다는 점만 느끼게 해줘도 그들은 교회로 올 것이라 확신한
다. 청년들은 비전을 주면 목숨을 걸고 청소년은 알아주면 목숨을 거는
세대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래문화
이제 둘째 문제, 즉 ‘또래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유치부, 유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대학부를 지나면서 교회의 청소년들은 12년에서 15
년간을 독립적인 예배와 모임으로 교회 안에서 또래문화에 젖어왔다. 언제
나 주위에 또래들이 있었다. 그 또래들과 함께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기쁨
과 슬픔을 나누었던 것이다. 또한 그 시절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보다는 또
래가 훨씬 더 편하고 재미있는 대화의 상대요 행동의 동반자이다. 우리 모
두의 경험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이 청년대학부를
지나 장년부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갑자가 ‘또래문화’가 아니라 ‘기성문화’의 막내로 전락해버리
고 만다. 장년부를 아무리 세분해 놓았다 해도 
그들이 느끼기에는 마찬가
지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대화의 상대가 사라져 버렸고, 행동의 동반자가
없어져 버렸다. 홀로 남은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가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이들이
대학을 진학하면 대학 속에 있는 같은 또래들이 모이는 선교단체에 가입하
여 교회를 떠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학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파라처치
(Para-Church)들이 바로 이러한 또래문화의 한 모습이다. 그들은 어린 시
절 교회에서 몸에 익힌 또래문화를 대학내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
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교회를 벗어나 나름대로의 또래문화를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즐기려 한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파라처치들이 우리 교회사
에 끼친 영향은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크게
보아서는 부정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면들을 경
험적으로 너무나도 많이 겪어오고 있다.

또한 12-15년 동안 자신들만의 예배를 드림으로 장년부에 올라와 저녁예배
를 드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저녁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시절을
보냄으로 저녁예배에 대한 훈련이 이루어지지를 않았다. 그 결과 저녁예배
에 대한 개념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오늘날 유초등부와 학생회 시절을 보낸 30대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저녁예배에 젊은 세대가 참
여하기 어려운 요소도 많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가족중심의 사회현상,
여가 시간을 누리기를 원하는 세대의식, 현대사회의 누적된 스트레스에 대
한 휴식시간의 필요성 등이다.

그러나 현금 미국등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저녁예배가 활성화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도들이 넘쳐나고 있을 정도이다. 수요일 저녁과 목
요일 저녁예배, 토요일 저녁예배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
다. 이는 과연 어떤 현상인가? 우리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도 낮 예배보다는 오히려 저녁예배 때에 젊
은 세대들이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른바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 저녁예배
를 드리지 않는 신앙습관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 속히 이러한 잘못된 신앙습관을 타파하고 바른 신앙의 모습을
가르쳐서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 안에서 그
들이 생의 풍요로움과 위로와 또한 삶의 활력 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과연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
을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시험적으로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겠
다.
하나는 계속적으로 연령적 또래를 만들어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전문분
야별 또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연령적 또래라 함은 장년부를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하고, 전문분야별 또래라 함은 각자의 취향이나 전문성에
따라 분야를 나누어 소그룹을 만들어 그 분야 안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들은 자칫 교회내에 분파를 조장할 수 있으
므로 위험이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또래문화를 교회 장년부에서도 계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
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
가? 아예 또래문화 자체를 없
애버릴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안 될 것이,
어린 시절에는 또 또래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필요한 또래문화가 장년부에 와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예배를
그래서 우리는 연령적 또래를 만들어주는 처방보다는 전문분야별 또래를
만들어주는 처방을 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문분야별로는 적어
도 연령적 또래문화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좋은 처방으로 우리는 ‘전교인 합동예배’를 추천
하는 바이다.
부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손잡고 교회로 나와서 함께 나란히 앉아 한 하나
님께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별도의 모임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예배 후
에 각부는 따로 별도의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즉 유치부, 유초등부, 학생부,
청년대학부 나름대로의 모임을 완전을 가질 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래문화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긴 하되, 그 또래문화에
너무 심취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또 일찍부터 모든 연령층이 함께 모이
는 자리에 익숙하게 만들어 주
자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훈련을 받
은 청소년들은 앞으로 장년부에 들어가서도 결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것
이다. 동시에 그렇게 각 연령층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행동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다양성과 조화를 배우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의식전환이 필요
우리는 이제 교회교육에 있어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매를 맞아가면서
교회로 향하던 20-30년 전의 청소년들의 모습이 다시 교회 내에서 나타나
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청소년들에게 재미있는 곳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재미있는 교회에 모여들고 자라면서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일
꾼들이 많이 배출되어 다시 한번 교회부흥의 시대를 도래케 해야 할 것이
다.
또한 또래문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교인이 함께 예배하는 예배가 연구되
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장년에 이르
러서도 자연스럽게 교회역사를 이어가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
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