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오류
작금 회자되고 있는 칭의와 성화와 관련된 이해에서 상당수의 신자들이 오해할 여지를 담고 있어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잘 알고 있다시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실체로서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구원론적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윤리적 부패에 직면한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다가오는 근자의 구원론적인 혼동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현상은 동전의 양면인 ‘칭의와 성화‘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잘못 이해할 때 나타나는 오류이다.
첫 번째 오류는 칭의 만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곧 값싼 구원, 공짜 은혜를 남발하면서 거룩한 삶과 윤리가 결여된 구원파적인 오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경우다.
이 경우, 오직 믿음을 말하나 단순한 지적동의와 자기 확신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차원의 실천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성화와 같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은덕을 부정하는 결과를 빚는다.
두 번째 오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우이다. 곧 구원파적인 윤리적 방종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반동으로 발생한 것으로 거룩한 삶과 윤리를 강조하나 칭의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윤리적 행위를 앞세운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최종적 칭의의 유효적 조건으로 앞세움으로써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공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경우 선행은 열매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이 된다. 결국 구원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셈이 되고 만다.
이러한 두 가지의 현상을 통해 우리는 안타깝게도 또 다시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긴장을 보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칭의(구원의 확신과 감격)와 성화(구원을 이루는 삶)는 그 뿌리와 열매로써 하나이다. 이것을 나누어 생각할 때 극단적 주장이 서로를 상쇄하고 대치시키는 오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의 완전성, 즉 칭의뿐 아니라 성화의 결정적 근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