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_배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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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스코틀랜드 성직자들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 행사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총대들은 성직자 4명과 평신도 귀족 2명이 참관인(Obsever)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의 활동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참관인은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1600-1661), 로버트 베일리에(Robert Baillie:1602-1662),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등이다.

 

알렉산더 헨더슨은 평신도 귀족 와리스톤의 아치발디 존스톤 경(Sir Archibald Johnston, of Warriston:1611-1663)과 함께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1638년 2월 28일 스코틀랜드 총회가 국민 언약을 결정할 때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던 분이다.

 

알렉산더 헨더슨이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참석할 때 60세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대원으로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16세에 세인트 앤드류 대학교를 입학했으며 20세에 석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 대학교에서 교수로 30세까지 십년 간 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 그는 모든 논쟁에서 높은 식견을 가지고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1646년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천하였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신학의 대변인과 같다. 그는 17세에 에딘버러 대학교에 입학해서 21세에 석사를 마치고 그의 나이 27살에 앤워드(anwoth)의 목사로 섬겼다.

 

1636년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논박서를 출판하였으나 알미니우스를 신봉하는 그 지역 감독 시드세프(Sydserff)에 의해서 주교들의 법정(Bishop’s High Commission)에 소환되어 그의 직무를 박탈당하고 감금당하였다. 그는 특히 알미니우스 세력이 강하였던 애버딘의 박사(Aberden Doctors)들과 몇 번에 걸친 논쟁을 하였고 그 결과 애버딘의 사람들(Aberden people)의 호감을 얻었다.

 

1643년 그의 나이 43세에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의 저서 중에 [장로회의 정당한 권리](Due Right of Presbytery)라는 작품은 노회 제도에 대한 신적 기원을 논증한다. 그리고 [교회 정치의 신적 권리](The Divine Right of Church Government)라는 작품은 에라스투주의자들을 논박한다.

 

그는 [장로회의 정당한 권리]라는 장로주의 논증서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사도 시대 첫 노회(Presbytery)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마리아 노회와 안디옥 노회가 사도들에 의하여서 개척이 되었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노회에서 수년간 복음으로 가르치다가 안디옥 노회 파송 선교사로 소 아시아 지방의 갈라디아, 고린도, 에베소, 데살로니가 지방에 노회를 개척한 것으로 본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바울 서신에 언급되는 지역 교회들을 모두 노회로 본다. 무엇보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를 최초의 장로회 대회(Juridical Synode)로 보고 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은혜 언약](A Treatise of the Covenant of Grace)이라는 저서에서 구속 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을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God and the Mediator Christ)이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키지 않고 복음 안에 율법을 종속시키면서 율법도 복음의 한 형태라는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조지 길레스피도 사무엘 리더포드에 못지않은 탁월한 장로주의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는 당대의 에라스투주의자들에 대한 정확한 논박서로 유명하다.

 

조지 길레스피가 노회석상에서 기도하였던 그 기도 내용이 소요리 문답 4문의 답이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즉석으로 요청받은 기도에서 “오 하나님! 당신은 존재에 있어서 영시이며 지혜와 권세와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라고 기도하였고 그것이 소요리 문답 4문의 답이 되었다.

 

24살 때인 1637년 “스코틀랜드 교회를 질식시키는 잉글랜드의 교황주의 의식들 ”(The English Popish Ceremonies, obturded upon the Church of Scotland)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비판하였다.

 

1638년 국민 언약에 서명할 때 그는 키르크칼디(Kirkcaldy) 노회의 웸시(Wemyss) 사역자로 있었다. 그해에 그는 글래스고우 총회에서 25세 나이로 설교하였다.

 

1643년 그의 나이 겨우 30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총대로 파송되어서 에라스투주의자들과 논쟁하여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탁월한 에라스투주의자 존 셀던은 그 와의 논쟁 후에 “내가 십년 동안 수고하여 이룬 학식을 한 순간에 날려 버렸다”고 치욕스러운 고백을 하였다. 조지 길레스피는 실로 “무서운 신동”이었다.

 

1647년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34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 애딘버러에서 개회된 총회에서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중병에 걸려서 35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수고 하여 얻은 열매는 교회 역사에 매우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스코틀랜드 성직자 중에 잉글랜드 교회와 종교적인 협상을 주로 감당하였던 로버트 베일리에는 15세에 글래스 고우 대학교에 입학해서 19세인 1620년에 석사를 취득했다. 1631년 성직 서임을 받고 킬위닝(Kilwinning) 교회의 사역자로 임명되었다. 1638년 그는 그가 속한 어빙(Irvine) 노회로부터 글래스고우 총회 총대로 선임되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대로 부름을 받고 그해 11월에 잉글랜드 런던에 도착하여서 3년간 수고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장로주의자였고 강력하게 고위 성직자 제도와 알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1651년 글래스 고우 교수로 재직하다가 1660년 왕정 복고 이후에 스코틀랜드에 감독 교회를 강요하려는 찰스 2세에 맞서서 죽는 날까지 저항하며 싸웠다. 그는 연로한 나이에 감독 제도를 세우려는 찰스 2세와 맞서다가 병으로 소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성직자들은 그 시대에 위대한 인물들이며 조국 교회를 진정 사랑한 목회자들이고 심오하고 보편적 학문이 있는 신학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