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칼럼| 찬양이 있는 신앙 _ 현창학 교수

0
322

묵상칼럼

찬양이 있는 신앙

 

<현창학 교수 _ 합신, 구약학>

 

시편은 우리에게 탄식기도와 찬양기도를
균형 있게 하나님께 올리도록 가르친다

찬양기도는 은혜와 복음을 잘 드러내므로
기독교 신앙을 이방신앙과 구별 짓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 미국의 유명한 구약학자가 “미국교회는 탄식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 교회가 긴 교회 역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간절히 부르짖어 구하는 기도를 할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부르짖어 구할 일이 없겠는가. 수많은 문제를 교회와 개인이 지니고 있어 응당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어야 하겠으나 오래 편안한 삶을 누리다 보니 이제는 문제가 있어도 기도하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과 문화가 몸에 배어 버린 것이다. 기도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습관과 문화가 돼버렸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곪아 썩어가는 심각한 죄와 중증의 질병이 번연히 있는데도 기도하지 못하는 교회에 비하면 한국교회는 (개인기도는 물론이려니와) 새벽기도로 여러 예배와 기도모임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며 참으로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힘겨운 근대사로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몸부림쳐야 했던 시간이 길었던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나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다. 게다가 속된 말로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이 같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오직 기도의 눈물방울이 쌓여 이루어진 기적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에 곤경에 처한 자신의 백성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귀를 기울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참고: 출 2:23-25) 감사하기만 할 따름이다.

탄식기도는(Lament) 과연 한국교회의 특기라 할 것이다. 특히 새벽기도는 그 기도의 장르를 말하라 한다면 탄식이 아닌가.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과 사회에 닥친 어려움을 토로하며 구해주시기를 그 얼마나 기도했던가. 아마 교회 역사 전체를 보아도 한국교회만큼 탄식기도에 능통한 교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탄식기도를 통해 수많은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을 경험하는 엄청난 은혜를 누렸다. 하지만 이 큰 은혜에는 한없는 감사를 올리면서도, 한편 우리의 기도 생활에 보완해야 될 중요한 점 한 가지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 보고자 한다.

성경에는 시편이라는 기도책이 있다. 시편은 성경의 유일한 기도집인데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기도드릴 때 그들의 기도를 그 책에 실린 기도들의 음성에 맞추어 기도하도록 가르치시려고 주신 책이다. 시편은 기도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시편에는 예닐곱 개의 기도 장르가 있으나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탄식기도와 감사-찬양기도(이것은 편의상 찬양기도로 통일해 부르기로 하자)이다. 이 두 기도가 시편의 기도를 이루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즉, 시편은 우리에게 탄식기도와 찬양기도를 균형 있게 하나님께 올리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탄식기도는 중요하다(탄식기도 및 탄식의 요소를 지닌 기도가 시편 전체 분량의 반 가까이 된다). 지상에 살아가는 인간은 항상 결핍 가운데 있기 때문에 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주세요” 하는 기도를 기본으로 살아가게 된다(참고: 마 6:11).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는(we pray and God answers) 단순한 명제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된다. 비록 거듭난 신자라 하더라도 지상에 사는 동안 걱정과 두려움에 쉽게 휩싸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탄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시편은 탄식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도를 가르친다. 그것은 바로 찬양기도이다. 찬양기도는 “주세요” 하는 것 대신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기도이다. (2인칭으로) 요구하는 것 없이 하나님이 이루신 큰 일들을 (3인칭으로) 진술만 하는 것이기에 ‘시인기도’(是認祈禱)라고도 부른다. 우리는 달라고 요구하는 것만 기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시편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다 하고 시인하는 것도 기도로, 그것도 아주 중요한 기도로 가르친다. 인간이 하나님께 건네야 될 말로서 달라는 요청만 아니라 하나님 하신 일을 그저 기술하는 시인도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시인, 즉 찬양기도를 잘 올려야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시편에는 8, 19, 29, 33, 95-100, 103-105, 111, 113-114, 117, 134-136, 145-150편 등의 찬양기도가 있다. 찬양기도의 특징과 내용을 살펴보자. 찬양기도들에는 탄식기도에 흔한 요소인 ‘불평’과 ‘간구’가 없다. 이는 우리의 두려움이나 걱정, 심지어 문제 해결을 위한 간구까지도 필요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인도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안심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찬양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출애굽)을 진술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출애굽으로 예표된 구속은 성경 계시의 핵심 진리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어 천국으로 인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영생이라는 삶의 질을 누리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이다. 창조의 진술은 태초의 창조만(creatio prima)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적 활동도(creatio continua)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안전하게 구원으로 인도하고 가장 복된 삶이 되도록 인도하는 섭리의 은혜까지를(gubernatio mundi)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찬양기도는 구속과 섭리의 은혜에 대한 진술이다. 구속과 섭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 전체를 범주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찬양기도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전 은혜를 시인하는 기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찬양기도는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적절한 기도이다. 십자가 구속에 대해 고백하고 섭리의 은혜에 대해 고백하며 이로 말미암아 성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싱겁거나 기도의 열심을 유발하지 못하는 유약한 기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주신 구원의 은총(출애굽, 십자가)을 기억하고 고백하므로 그 은총과 기적이 신자의 삶에 새롭게 활성화되게 하는 언약갱신적 기도이므로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기도해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의 기도이다. 찬양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성격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이방신앙과 구별 짓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거듭 말하지만 “주세요” 하고 요청하는 탄식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필요를 채움 받으며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은혜의 수단인가. 탄식이 약해지거나 멈추면 우리의 미래나 운명도 멈춘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지면서 간구하는 기도가 약해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더 많이 모이고 더 열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달라고 하는 기도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이 기도생활에 대해 반성하면서 우리 마음에 꼭 새기게 되는 점이라는 말이다. 우리 신앙은 “주세요”로만 일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하는 시인(是認)의 기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달라는 기도에만 머무른다면 우리가 재래적 민간신앙의 수준에서 얼마나 탈피하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찬양기도를 우리 믿음의 언어가 되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칫 감염되기 쉬운 이방성을 완전히 털어 버리고 우리 신앙을 복음의 본질 위에 굳건히 세울 수 있다. 찬양은 하나님 하신 일을 기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 신앙도 이때 비로소 구현된다. 우리의 기도를 시편 찬양의 음성에 조율하는 법을 배우자. 세상의 어떤 아픔 슬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깊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과 더불어 깊이 교제하는 성숙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