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 – 전체를 전부로’에 대한 이해
< 김봉찬 목사, 울산중부교회 부목사 >
“신앙고백은 성경 자체를 다루면서,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꼭 붙잡아야 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은 척도이며, 기준이며, 틀”
우리가 흔히 ‘5대 솔라’라고 부르는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구호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구호는 오랫동안 앞의 ‘솔라’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전체 성경으로”, 즉 “tota Scriptura”입니다.
“전체 성경으로”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 성경 전부를 신앙과 삶의 유일한 권위로 삼으며,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면을 동시에 다루는 태도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 66권이 내는 한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전반적으로 성경이 66권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적습니다. 주제별 성경공부는 열심히 해도 성경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파편으로 기억하며, 그저 몇 구절만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성경을 보는 안목이나 성경적 시야가 아주 좁아서 자기 조각이 최고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편협한 신자가 양산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외쳐야 할 구호는 “오직, 그리고 전체 성경으로”(sola et tota Scriptura)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설교와 성경공부가 넘치는 홍수 시대,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내용은 빠져버린 이 세대에 필요한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1. 성경읽기부터
첫 단계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원리와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능지수나 나이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성경 읽기는 글자를 알고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일단 읽는 겁니다.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게 안 되면 그저 게으른 겁니다.
태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 듯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이 직접 말씀해주시고, 내가 그 앞에 엎드리며, 주를 경외함으로 홀로 주 앞에 선다는 고백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 이전에 성경 자체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분명한 진리이다’는 고백으로 책을 먼저 접해야 합니다. 읽기가 기본이요 우선순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어떤 내용은 비밀로 숨겨져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오해할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설교 잘 듣기”입니다.
2. 설교와 설교자
설교는 성경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바른 해석과 가르침을 위해 교회 안에 말씀의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그 사명의 본질이요,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 꽃이 활짝 피어날 때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해 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용으로 듣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예배 분위기나, 성가대의 화음이나, 사람들의 미소 때문이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 때문이라면 은혜를 받은 게 아닙니다. 단지 감동한 것뿐이죠. 내 감각 기관이 외부 현상에 반응하는 것과 은혜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단지 그뿐인 감동이라면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인적인 변화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설교는 내용입니다. 가슴부터 데우려고 달려들면 안 됩니다. 기억도 내용이고, 적용도 내용이고, 비전도 내용입니다. 삶도 내용으로 채워야 합니다. 귀로 곱씹으며 듣고 머릿속에 먼저 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텅 빈 머리로 가슴을 불태울 수 있을진 몰라도,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슴이 뜨겁길 원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은 말씀의 장작을 태우십니다.
3. 설교자와 회중
바른 듣기를 위해 바른 설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오직 성경으로 풀어낸 설교가 올바로 선포될 때 다른 은혜의 방편이 따라오며, 교회의 표지와 속성이 바로 일어나고, 주의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말씀 사역자의 책임이 참으로 큽니다.
바른 내용과 성령님의 역사가 동시에 이뤄지길 간구하며 누구보다 절실하게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부족한 자신을 붙잡고 날마다 씨름합니다. 말씀의 통로이자 청중으로, 마음으로는 가장 앞에서 엎드리며 예배합니다. 입술로도, 가슴으로도 선포하길 기도합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책임을 다할 때, 이제 교회는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회중은 말씀의 통로인 목사를 신뢰하며 설교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까? 직분자는 말씀의 모든 부요함에 이르려고 일주일간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이런 면에서 올바른 신뢰 관계가 정립된 교회는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최고의 QT는 주일 공예배에 선포된 설교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께서 세우신 목사의 설교가 귀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자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설교만 제대로 들으면 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목사 개인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욕심이나 실수로 성경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셋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교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4. 교리의 중요성
교리는 넓게는 성경 자체 혹은 성경을 체계화한 내용이며, 좁게는 역사적 신앙고백(교리에 대한 반응으로서 신조, 신경, 교리문답)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알아간다는 것은 먼저 성경 자체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이며, 다음으로 역사적 신앙고백에 관한 공부입니다.
성경은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모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유월절과 성찬을 배울 수 없지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경을 아예 안 읽으면 모든 단계가 무용지물입니다. 설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아무리 쉬운 설교도 은혜는커녕 지루하기만 합니다. 재밌는 부분만 듣습니다. 자연히 성경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여전히 안 읽고 안 듣습니다. 듣지 않으니 신앙이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다시 안 읽고, 안 듣고, 결국 안 가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거기에 대고 웨스트민스터니, 소요리니 하면 정말 도망가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교회 안에 있던 터라 그래도 뭔가 안타깝고 은혜에 목마르긴 한데 그게 자연스럽게 되길 원하지 스스로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일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자신도, 주변에서도 안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교묘하게 비껴난 종교생활을 지속하고 있는데 뭐가 성경 중심이고, 뭐가 바른 신앙생활이겠습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펴고 배워야 합니다. 띄엄띄엄 성경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몇 년, 십몇 년 굳은 것이 한두 달에 풀리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풀어가야 합니다. 우습게 여겼던 성경 순서나 열두 지파 이름도 외우고, 레위기도 한 번 독파해봐야 합니다. 부지런히 읽고 탐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청년의 때에 이것을 놓치면 평생 성경 변두리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은 보편 교회가 오랫동안 다듬어 온 보석입니다. 성경 전체의 정제된 해석이자 열매이고, 누구의 입맛에도 잘 맞게 차려진 요리이고, 성경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집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잘 살피면 성경해석과 삶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와 설교만으로 부족한 내용을 여기서 채우고,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목사 역시 신종 교리나 개인적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안수받을 때 맹세한 대로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신을 세우며, 이것을 잘 가르치면서 진리를 보존합니다.
신앙고백은 성경 자체를 다루면서, 전체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꼭 붙잡아야 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은 척도이며, 기준이며, 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좋은 참고서로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입니다. 최소한의 성경적 기초라도 있어야만 이 귀한 신앙고백에 바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을 공유한다는 것은, 모든 신자의 객관적인 반응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뜻이며, 시공간을 아우르는 보편교회라는 표지이며,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에도 충실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 됨으로,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의 삶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적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더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의 근본과 목적이 성경 자체이며, 성경이 교리의 근거임을 잊지 말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도 필요하고, 신앙고백서 공부도 필요합니다. 성경으로 교리를 확인하고, 다시 고백을 통해 반응해야 합니다. 반복과 반응, 이것이 신앙고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5. 종합적 사고력
이상이 “오직 그리고 전체 성경”을 이루는 네 가지 단계이지만, 편의상 나누었을 뿐 이 네 가지는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읽고 듣고 연구하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꾸준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성을 두드리는 작업” 위에 겸손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성령님의 빛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태도는 무엇보다 영적인 일입니다. 지성을 두드리고, 감정이 움직이며, 의지 전체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도록 수시로 간구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올바로 진행될 때, 비로소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 사고력”이 내 안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종합 사고력(성경적 세계관, 성경적 가치관 등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무엇에든 스스로 적용할 수 있는 선명한 기준이 생겨나면 비로소 성경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터져서야 부랴부랴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 한 구절에만 인생을 걸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으며, 누가 적용거리를 던져주지 않으면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삶에서 부딪치는 온갖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며, 변하지 않으며, 치우치지 않는 전체 성경의 원리가 성경 읽기를 통해, 바른 설교를 통해, 교리를 통해 확립되면, 비로소 내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전체 성경의 원리가 내 안에 채워질 때 그렇게 됩니다. 때로는 엎어져 울더라도 전인격은 여전히 성경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는 말
“성경 중심”이란 삶의 운동입니다. 그러나 운동 이전에 내 안에 정적인 역사 즉, 머리가 성경을 따라 맹렬히 회전하여 기억하고, 비교하며, 적용하는 일이 있어야 하기에 위와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지는 것,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성경의 원칙대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 지성으로 반응하고, 감정과 의지가 계명에 순종하는 것, 우리 몸의 세포 하나까지 말씀으로 꽉 차게 듣고,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요, “성경 중심”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중심을 외치려면 일단, 거기 있는 성경을 집으십시오. 그리고 펴서, 읽으십시오. 성경 전체를 계시의 전부로 받을 때까지 말입니다.
1548년, 교회의 위대한 교사인 칼뱅 선생이 영국의 호민관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기회가 되어 편지 전문을 읽어보시면, 이 단언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모어 경, 제 말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요리문답 없이 결코 보존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