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특강
페미니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2)
<홍구화 교수 _ 합신|기독교상담학>
<목차>
- 들어가며
- 서구 페미니즘의 흐름
- 한국의 페미니즘
- 개혁주의 신학과 상담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
- 맺는 말
페미니즘은 피조계의 한 단면을 절대화하고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는 환원주의의 한계 가져
여성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정신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는
자아결정과 자아 방향성도 존중받아야
다양한 갈래의 페미니즘의 문제와 개념들에 통합적 인식과
비판 의식을 갖고 성경적 대안 도출 노력이 필요
- 개혁주의 신학과 상담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
개혁주의는 인류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 역사, 곧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의 구도 속에서 바라본다. 이런 점에서 먼저 페미니즘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창 1: 27-28).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남성과 여성이 갈등 관계가 된 이유를 성경은 명백히 죄의 결과라고 말씀하신다. 죄의 결과로 인해 타락한 세상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주도권 다툼과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창 3: 16).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남성과 여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창조 때의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갈 3: 2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재림 사이의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 속에 있는 이 시대에 남성 우월주의, 여성 우월주의, 남성과 여성이 분리되어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성과 남성이 창조 때의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남성을 투쟁 대상이나 회피 대상으로 삼고 여성 우월주의나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또한 피조계의 한 단면을 절대화하고 단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는 환원주의의 한계를 가진다.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 양성 평등, 가부장제의 해체, 사회정의 등 각 세대 페미니즘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원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가치와 주장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상이 된다. 제 2 세대 페미니즘은 세상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억압관계로 보고 그 시각으로 여성의 문제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으로 이해한다. 페미니즘이 다른 집단의 억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제 3 세대 페미니즘도 세상을 지배와 억압이라는 시각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의 한계를 가진다. 환원주의의 오류의 예를 들면, ‘탈코르셋 운동’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꾸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 그러나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자기실현 욕구나 자신의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꾸민다. 남성들도 꾸민다. 우리나라에서 패선과 뷰티 등 외모에 투자하고 가꾸는 것을 즐기는 그루밍(grooming)족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2015년 미국 CNN은 한국 남성의 인구 당 화장품 구매량은 세계 최대이고 덴마크의 4배라고 소개했다. 우리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는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에서 오는 지혜와 지식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각 세대 페미니즘을 검토해 보겠다.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요시한 제 1 세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여성 참정권의 획득에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아결정과 자아방향성의 기치 아래 임신 종결권, 즉 낙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기독교 신앙과 배치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재발견한 너스바움의 인간 역량 이론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선택의 자유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죄성과 세상의 불완전성을 간과하고 있고 여성 삶의 주관자를 여성 자신에게 두는 인본주의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타락한 세상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선택의 자유와 선택한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너스바움의 말을 개혁주의 관점으로 옮기면 여성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삶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여성들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인도하신다. 성경에서도 그 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 미리암(출 15: 20-21), 사사 드보라(삿 4: 4), 선지자 훌다(왕하 22: 14-20), 선지자 안나(눅 2: 36-38), 예언을 한 빌립 집사의 네 딸(행 21:9),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마리아(요 12: 3),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는 시대에 부활의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 28: 1-10), 복음전도자로 쓰임을 받은 브리스길라(행 18: 18-28; 롬 16: 3-4)와 루디아(행 14: 14-15)와 뵈뵈(롬 16: 1) 등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 자아결정과 자아방향성이 존중되려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존중되는 사회여야 한다.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국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존중되기 힘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자아결정과 자아방향성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사용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2세대 페미니즘에 영향을 미친 성 해방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성적 쾌락을 위한 섹스를 주장하며 결혼 제도에 도전하였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지는 결혼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비한다(엡 5: 31-33). 섹스는 단지 성적 쾌락만을 위한 것이 될 수 없고 언약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인격적인 연합이어야 함을 보여 준다. 또, 제 2 세대 페미니즘의 젠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모두 사회문화의 산물로 보는 환원주의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사회문화의 영향을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데에서 오는 남성과 여성의 생득적인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
제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정치화하고 여성 문제의 근원으로 가부장제를 지적하며 남녀 간의 관계를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입법이 있었고 간통제가 폐지되고 부부간의 성폭력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남성과 여성의 성질서와 결혼과 가정의 질서를 벗어나는 성적 만용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모든 문제를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환원주의의 오류이다. 한 여성이 경험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이 속한 사회와 가족 체계의 영향과 함께 여성 개인의 기질, 성격, 지능 등 개인적인 요소도 고려하여야 한다. 또, 남성들을 한 범주에 넣어서 모두 가부장제의 기득권자로 보는 것도 환원주의의 오류이다. 예를 들어, 2018년 1월에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는 남성은 2017년에 17만 명에 달했다. 전업주부 남성은 2003년 10만6,000명이었다가, 2010년 16만1,000명까지 늘었고, 2014년에는 13만 명까지 감소했다. 그러다 2015년 15만 명으로 다시 증가한 뒤 2016년 16만1,000명, 지난해 17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통계청은 은퇴한 남성들이 다른 일을 찾지 않고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가 늘어서 증가한 것으로 해석한다. 여성들의 고용률이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늘면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성 역할에 대한 의식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2012년에 취업포털 인쿠르트가 대학생 43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남자 대학생들의 60%가 전업주부가 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남성이 전업주부가 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로는 사회적 편견을 꼽았다. 남성들도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의식이 많이 변하고 있는데 가부장적 사회적 편견의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여학생들의 절반가량은 결혼 후 남편이 전업주부를 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는데 주된 이유는 남편이 직장생활을 할 경우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의 분석에 의하면 지난 해 우리나라 남녀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 격차는 30.7%로 여성의 시간당 평균 임금이 남성보다 30.7% 적었다. 전문가들은 남녀 임금 격차의 원인을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저임금 비정규직에 취업하는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한다. 또, 교육연수의 기회, 업종 차이, 근속연수 등 여러 요인들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당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이유로 남성은 4% 정도를 더 받고, 여성은 58%를 덜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차별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 준다.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남녀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타당성을 얻는 이유이다.
파이어스톤은 핵가족 안에서 어머니가 아기를 양육하는 것이 남녀 간의 권력 차이를 초래한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남녀의 불평등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무시하고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 필요한 모성 돌봄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자녀양육에 헌신하는 것을 모성 신화에 견주며 평가절하 하는 이들도 있다. 발달 심리학과 애착이론이나 대상관계 이론들 모두 임상과 연구 결과를 통해 인간의 성격과 정서적 발달에는 영유아기에 주양육자로부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돌봄을 받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 준다. 주양육자는 대개는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주양육자가 되지 못할 때에도 아기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려면 자주 바뀌지 않는 일정한 주양육자가 필요하다. 주양육자는 아버지, 할머니, 보모나 어린이집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 아기는 주양육자와 어머니와 복수의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아이는 대개 만 18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대상항상성(어머니가 만족시켜 주든 아니든 어머니에 대한 일정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대상영속성(어머니가 눈에 안 보여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형성해 가며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개별화된 존재가 된다. 아이가 대상항상성과 대상영속성을 형성하기 전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와 분리되는 것은 정서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성차별을 초래한다고 결혼제도나 여성의 육아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여성이 경력단절을 겪지 않고 육아와 직업을 병행할 수 있는 가정과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정책들을 고안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실제로 저출산율이 큰 문제인 우리 사회에서 국민건강보험 공단이 2015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건강보험 직장가입 여성 중에서 공무원과 교사가 일반회사 직장인 보다 출산율이 1.6배 높았다. 2016년에 교육부가 “시도별 다자녀 교원 현황”을 분석한 것을 보면 기혼교사의 50.6%가 둘 이상의 자녀를 낳았다. 2013년~2016년 중앙부처, 지자체 공무원 출산휴가 현황을 분석한 조사에서도 공무원 출산율이 일반인보다 최소 2배 이상 높았다. 남성 공무원인 육아휴직자들도 많았다. 공무원과 교사의 출산율이 높은 이유는 소득이 더 높아서라기보다 출산과 육아휴직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고 공무원의 경우에는 직장 어린이 집 같은 보육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출산과 육아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사회연구원이 2015년에 출산전후 6개월간 취업 중이었던 기혼여성을 조사한 결과 공무원과 국공립 교사는 77.3%가 육아휴직 경험이 있는데 비해 일반회사 등 민간부문 직장인은 33.1%에 불과했다. 여성이 남성과 함께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할 수 있게 충분한 출산과 육아 휴직 제도와 탄력근무제 등을 도입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기업 문화와 정책들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여성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정신을 가지고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는 자아결정과 자아방향성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남성이 가정 상황에 따라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여도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부부의 경제능력 차이나 그 어떤 차이도 부부 사이에 힘의 논리를 따르는 권력의 차이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부부의 권력구조는 남성우위형, 여성우위형, 권력분리형, 권력평등형으로 나눌 수 있다. 권력분리형은 부부가 역할을 나누고 맡은 역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구조이고 권력평등형은 역할을 나누되 책임은 같이 지는 구조이다. 부부의 권력구조가 남성우위인 경우 평등형보다 가정폭력의 위험이 4배나 된다. 가정폭력이 가장 적은 부부의 권력구조는 권력분리형이나 여성우위형이 아니라 권력평등형이다. 권력분리형은 서로의 기대에 못 미칠 때 갈등의 소지가 많고 폭력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부는 주 안에서 서로 존중하되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자원하여 순종하며 존경하는 관계이다(엡 5: 21-33).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 됨(갈 3: 28)을 회복하는 관계이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과 모성성을 재평가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살만 하나 레즈비어니즘을 찬양한 면은 기독교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들만의 대안 문화를 만들고자 한 것도 남성과 여성을 대립과 분리의 관계로 보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치와 배치된다. 레즈비언 분리주의도 남녀로 이루어진 결혼과 가정의 기본 질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가치에 어긋난다. 반면, 남성들의 성적 위험과 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포르노 운동이나 반성폭력 여성운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여성들에 의한 성적 위험과 폭력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적 규범을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제 3 세대 페미니즘은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며 다양하고 다층적인 형태의 억압과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는다. 제 3 세대 페미니즘도 사회를 억압관계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환원주의의 한계와 절대 가치와 규범을 인정하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로 대표되는 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볼 것을 명령하셨다(출 22: 21-27).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사회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환원시킨다. 사회와 관계의 성숙한 변화를 위해서는 좀 더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또, 성적 다양성을 명목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된 성 질서를 무시하거나 한 남성과 한 여성으로 된 결혼과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기독교 가치에 어긋난다. 이는 성 소수자들의 아픔과 소외에 공감하고 이들을 돌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 맺는 말
페미니즘은 자연주의, 인본주의, 환원주의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도 인간 사회의 어느 일면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에서 오는 지식과 지혜가 있다. 제 1세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공헌으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제 2 세대 페미니즘의 공헌으로 여성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여성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법률 제정들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신좌파적 계급투쟁, 성 해방, 레즈비언 분리주의, 동성애와 동성혼 옹호 등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는 주장들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전부 아니면 전무의 이분법적 사고로 페미니즘을 바라보기 보다는 다양한 갈래의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개념들에 비판 의식을 가지고 통합적으로 문제들을 바라보며 성경적인 대안들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