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논단
박탈과 분리의 트라우마 치유
<이경희 목사 _ 대구 한빛교회>
출생 때부터의 박탈과 분리 트라우마는
일생을 살아가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박탈과 분리 트라우마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후
그분과의 일체감에서 치유된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철이 일찍 든다고 그렇게 말을 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회갑이 넘어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여자가 남자를 보고 철이 없다는 말을 하지 남자가 여자를 보고 철이 없다고 하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대표적인 상처가 박탈감의 상처와 분리감의 상처다. 태어날 때 박탈과 분리의 공포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인 트라우마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여자가 잉태하면 태아는 산모의 몸속에 있는 아기집이라는 곳에서 자라서 10개월이 되면 산모의 몸 밖으로 나와 세상과 접하게 된다. 아기집은 태아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며, 아주 아늑하고 평안하여 천국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기집 안에 있을 때는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없고 절대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 아기집 속에서 살 때는 먹고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숨쉬는 것조차도 자기 스스로 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산모에 의해서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면 환경이 급격하게 바뀐다. 태어날 때 일어나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로 아기는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이 때 사람에게 근원적인 트라우마가 생긴다. 이 지면에서는 가장 큰 2가지 트라우마를 살펴본다.
첫 번째는 박탈 트라우마다. 산모가 출산하여 아기가 태어나 세상으로 나올 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일어날까? 지금까지 지냈던 아늑하고 평안한 아기집이 터져 버린다. 아기집이 터짐과 동시에 천국같은 환경에서 거친 광야같은 환경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 때 아기는 엄청난 박탈감을 무의식적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천국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가는 것과 같은 엄청난 박탈감을 아기는 느낄 것이다. 이것을 박탈 트라우마라고 한다.
두 번째는 분리 트라우마다.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와도 아직까지는 탯줄에 의해서 산모와 한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엄마와 한몸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엄마와 일체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탯줄을 끊는 순간 아기는 엄마와 한몸이 아니고 엄마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된다. 아기집 속에 있을 때는 엄마가 영양을 전적으로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엄마와 분리되어 혼자가 되면 자기 스스로 먹어야 산다. 자기 스스로 먹지 않으면 죽는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기집 속에 있을 때는 자기가 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 산모가 산소를 다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탯줄이 끊어지면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엄청난 환경의 변화를 맞게 된다. 이 때 아기는 분리되는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분리감의 상처가 생긴다. 마치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때 느끼는 그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 같은 것이다. 이것을 분리 트라우마라고 한다. 이런 박탈과 분리의 상처는 아기가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먼저, 박탈 트라우마의 영향을 살펴본다. 아주 어린 아기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면 분노하고 울며 못 견디게 괴로워한다. 아기가 먹고 있는 것을 빼앗아 버린다든지,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면 출산할 때 받은 박탈감의 상처가 올라와서 크게 분노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박탈감을 채우려고 한다.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박탈감을 채우기 위해서 돈으로 채우고, 권력으로 채우고, 그리고 명예로 채우는 등 일평생 채우기에 급급한 인생을 산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을 다 채워도 그 박탈감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솔로몬은 세상에서 자기 눈에 원하는 것을 다 채워 보아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했다.
다음은 분리 트라우마의 영향이다. 어린 아기를 보면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엄마와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왜냐 하면 세상에 태어날 때 받은 분리감의 상처가 올라와서 엄청난 분리의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기가 좀 자라면 자기편을 모으기 시작한다. 성인이 되어도 그런 현상은 계속된다. 특별히 남자들은 자기편을 많이 만들어서 분리감의 상처를 해소해 볼려고 한다. 왜냐 하면 다른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엄마와 태속에서 느껴 보았던 일체감을 느껴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단 집단들이 기를 쓰고 자기편을 끌어 모아서 자기 회원을 불리려고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자기편 사람들은 자기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도와주고, 힘들 때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 사람들은 심리적인 원수로 생각하고 싸운다.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고, 비판하고, 무시하면 심리적인 원수로 생각한다.
그러면 왜 여자들은 일찍 철들까? 여자들은 아기를 낳은 후부터 철들기 시작한다. 왜냐 하면 아기를 낳으면 자기와 한 몸이었던 아기와 본능적으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생길 때 비로소 인생을 깊이 알게 되고 철들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되면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아기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기쁘게 바칠 각오도 되어 있을 만큼 일체감을 느낀다. 아기를 낳은 후 여자는 크게 변한다. 어머니는 아기와 한몸이 되어 보았기 때문에 아기의 고통이 자기 몸의 고통으로 느껴져 함께 고통을 느낀다. 어머니는 이제 자기 생명까지 바쳐서도 사랑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기초로 한 한몸의 관계, 일체감을 느낄 때 비로소 성숙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남자라도 어머니의 이런 감정을 느끼기가 본능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남자는 아기를 낳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여자들이 볼 때 남자들은 철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아기를 낳은 후에 여자는 박탈과 분리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자기와 한몸이었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기를 위해서 어지간한 상처나 어려움이 와도 남자보다 훨씬 더 잘 적응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박탈과 분리 트라우마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박탈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인간이 잉태해서 자란 아기집과 같은 환경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보면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쫓겨난 에덴동산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지옥이 예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점점 들어 지옥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박탈감을 더 많이 느끼며 불안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에서 벗어나 천국이 예약되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박탈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내가 박탈당했던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수 있도록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 가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실아 있는 동안에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 때 박탈감의 상처는 무력하게 되고 박탈감이 아니라 가득 채워진 마음으로 살아 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탈 트라우마의 치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분리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나와 일체감을 가질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존재라야 한다. 그 존재는 나를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랑을 가진 존재라야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희생하여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이시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 일체감을 느낄 때 비로소 분리감의 상처는 회복이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5-7)”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실상을 알면 불쌍히 여기 않을 수 없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에 불신자도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기고 불쌍한 마음이 들고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박탈당한 존재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며 자기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다.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분과 이별한 슬픈 존재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신다. 이런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있는 인간을 보실 때 아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박탈당하고 분리당한 인간의 실체를 볼 때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고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셨다(마28:16-20). 사도바울은 고전 4장 15절에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수천수만의 사람을 사역하는 스승 사역자도 참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일체감의 측면에서 보면 한 사람이라도 복음으로 낳은 영적 해산과 말씀으로 양육한 영적 아비가 더 깊은 일체감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에게 디모데같은 영적 자녀가 있었듯이 우리가 많이는 못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분량대로 일생에 한 사람 이상 영적 자녀를 낳아서 영적 일체감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럴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박탈과 분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서 충만한 채움과 사랑의 일체감 속에서 살아 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