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설교
광야를 행하는 법
<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학, 본보 주필 >
* 이 설교문은 설교집 <합신채플 제4권>에 실린 것으로 저자의 허락 하에 편집상 맥락의 손상이 없는 선에서 축약하여 소개한다.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 민 2:1-2, 10:33 )
하나님을 찾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 자기 자리를 정립하는 것이 경건의 연습
광야 이스라엘의 불평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서려는 태도 때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이중잠금장치로 보장하심
오늘 미로 같이 복잡한 인생, 세상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 심지어 믿음의 길에서도 방황하기도 하고 사역에서도 그렇다.
1. 광야의 진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국면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출애굽과 시내산의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과의 언약식 등 굉장한 경험을 했다. 또한 놀라운 전망이 있었다. 눈앞의 약속의 땅, 그리고 거기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생한 너희를 해방했다. 이제 가나안을 마련해 두었으니 헤쳐 모여라.”라는 식으로 안 하신다. 만만치 않은 광야를 통과케 하신다. 의식주 등의 모든 결핍으로 상징되는 광야. 게다가 위험하고 불확실한 여정. 그런 곳을 어떻게 건너 안전하게 가나안에 도착할 것인가? 이 당면 과제의 답을 말씀하신다.
2절에 핵심 메시지가 있다.
먼저 “회막을 향하여 진을 치라(새번역–회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라).”하신다. 회막은 하나님의 처소의 상징으로 출애굽, 시내산은 물론 광야에서도 함께 행하신다는 것, 즉 이스라엘의 광야 통과를 위한 제1조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야의 진실은 삭막함, 황량함, 결핍, 위험…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그것이다. 이곳을 통과해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원만 받고 버려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보냄 받은 존재라는 것.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케 하실 능력과 지혜, 사랑과 자비와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시라는 것이다.
이 숨겨진 하나님의 능력의 비밀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40년간 매일 매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이웃과 옆 지파를 늘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 자기 자리를 정립하는 것이 일종의 경건 연습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연습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설정하는 연습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2절 원문은 민네게드(םנג),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서(‘some distance off’ NIV) 진을 치라고 한다. 회막과 거리를 두라는 것. 이는 첫째, 거룩의 거리이다. 타락한 죄인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바로 모시는 태도, 곧 안전거리이다. 둘째, 이는 또한 은혜의 거리이다. 레위인의 거리가 있고 대제사장의 거리가 있다.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로 열어 두신, 택하신 자는 가까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셋째, 이는 연합의 거리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상호 거주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이는 실상 거리가 없는 연합의 관계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어 이루어진 관계이다.
2. 광야를 통과하는 비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안에 거주하시는 거룩한 성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거룩의 거리가 다 취소된 것은 아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의 거룩함은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가? 구약의 성전이 지극히 정결해야 했듯이 성령의 전인 우리는 더욱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파들에게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을 치라 하신 것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각 지파의 위치는 달랐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내 이웃 지파가 어디 있는가? 그 둘을 축으로 각 지파가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다. 공동체의 행군은 “나 하나 빠져도 되겠지”하는 생각을 불허한다. 지파마다 자기 자리와 역할과 기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좌표를 찾아야 한다. 인생은 미로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생은 하나님 나라의 좌표가 다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세상에서의 나의 자리, 교회에서의 나의 자리가 있다. 또한 우리에겐 좌표 없이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자꾸 알려 줘야 할 책임도 있다.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야영 때나 행군 때나 자기 자리를 이탈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경건의 큰 훈련이다. 신학생들도 공부에 대한 강박으로 경건회나 기도회의 시간을 이탈하여 나중에 하면 되겠지 하면 안 된다. 성경의 추천코스는 항상 최단거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성장, 성숙은 단기속성 코스가 아니다. 그것이 가나안을 향하되 먼 광야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법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빠름도 늦음도 없다. 우리의 계산과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앞서 가선 안 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불평은 결핍 때문이 아니다. 실상은 하나님을 앞서려는 태도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기 계획과 생각을 앞세우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제자의 핵심적 특성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진정한 팔로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막아서며 앞서다 혼난 적이 있다. 철저히 그리스도만 따르는 것이 광야를 통과하는 비밀 중 하나이다.
3. 하나님의 보장
광야는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다. 천국의 시민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서 광야적인 특징을 여전히 갖고 있다. 오늘 믿음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이 시대를 보낼 것인가의 측면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다는 것이 금과옥조이다. 하나님 앞에서 만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자리가 있으므로 구속사적인 성취인 연합을 이루어 가게 된다.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은혜의 베풂을 통해 볼 때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연합된 자들이다. 성경은 “내 안에 거하라”고 부단히 권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특징적 교훈 중 하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 원칙과 은혜를 따라서 제대로 머물게 될 때 열매를 많이 맺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 주신 보장은 이중잠금장치처럼 확실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거기서 빼낼 자가 없어서 그 자체로 완벽한 장치인데,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면 그가 떠날 일이 없으시다. 이런 이중의 안전장치를 통해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는다.
그런데 거기 머무르라 했다. 그냥 있으라가 아니라 그 안에 계속 머루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유혹이 있고 힘들고 어렵다. 일상의 따분함이 있다. 그럼에도 머무르라는 것이다. 아침 운동을 해 보면, 하고 나면 좋은데 그 다음에 일어나 또 하려면 여전히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기 싫어진다. 그런데 하고 나면 또 좋다. 그만큼 쉽지 않다. 치열한 싸움이 늘 있다. 이렇게 힘들고 귀찮은 과정에서 치열하게 견디며 이런 생각을 한다.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책에서만 보고 설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 과정이 중요하다. 신학교 과정도 그렇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이 목회할 준비가 됐는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신뢰할 수 있는 경건의 연습과 삶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약속의 땅에 나아가는 과정의 원리를 이스라엘이 진영을 이루고 광야 길을 가는 것을 통해 보았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나아감으로 결국 연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일상을 살고, 또 사역을 준비하고 감당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