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칼럼
우리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 김수연 목사_서부제일교회 >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워질 수 없으며 본질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의 지식, 경험, 편견이 아닌
하나님 말씀 앞에 진실하게 묻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사람이 먹는 물은 정수의 과정을 거쳐 생수가 된다. 오랜 세월을 거쳐 땅 속으로 스며들면서 정화될 때 맑고 깨끗한 생수가 된다. 빗물이 지하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땅 위로만 흐르는 물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생수는 땅으로 스며들어 정수의 과정을 거치고 그리고 밖으로 분출될 때 생수가 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에비앙’이라는 생수가 있다.
이 생수는 프랑스 에비앙 마을에서 퍼 올리는 생수이다. 이 에비앙의 생수는 15년 동안 땅 속에서 걸러진 물이라고 한다. 알프스 산의 눈 녹은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에비앙에 이르기까지 최소 15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처럼 장기간에 걸친 내면화된 물이 밖으로 나올 때 그 물은 ‘에비앙 생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제된 깨끗한 생수를 마시기 원할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우리의 삶이 그러한 삶이되기 위해서 우리의 공동체가,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에게서부터 정화되는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어떤 사고, 관습, 방식… 이러한 것을 그냥 그대로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땅 속 깊이 내면화해서 정제한 후에 나오고 분출하는 생수같이 우리도 하나님 그분 안으로 들어가서 정제되고 새로워진 후에 우리의 삶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 생명력을 가진 삶,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옳은가? ‘주님, 내가 지금 주님 앞에서 옳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서 옳은지요?’ 이 질문이 없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고, 세상에 속고 만다. 지금 나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살고, 주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고, 그 방법으로 일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워질 수 없으며 본질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질문할 때 고민하게 되고, 고민함으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은 선민인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데 왜 선민인 우리가 이러한 부당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선민이 고난 받고, 침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계속 묻는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절).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박국은 자신과 이 민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른지를 알고 찬양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절).
시편의 기자도 선한 사람들보다 악인들이 잘되고 형통함에 대해 분노하고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때 그는 깨닫게 되고 이처럼 고백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절).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마틴 루터가 수도사가 되고 나서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도전은 ‘이것이 옳은가?’였다. 선행을 한다고 하지만 몸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신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의 법에 따라 고해성사를 밥 먹듯이 했다. 하고 또 하고 하루에 일곱 번씩, 많을 때는 스무 번까지 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고해성사해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27세가 되던 해 1511년 그는 로마를 방문한다. 로마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실 때 오르셨던 28계의 ‘성계단’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 함으로 계단이 다 닳을 정도였다. 루터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마음의 평안함이 없었다. 이렇게 고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 마음속에 성령으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마치 땅 속 깊이 스며들듯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으로, 말씀 속으로 스며들어 갈 때 거기서 정제되고 거기서 지혜를 얻고, 거기서 마음을 얻으며 거기서 새로워진다. 말씀을 볼 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보고, 이것이 바로 나를 정제하고 새롭게 하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답을 얻는다. 마틴 루터의 개혁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전통과 계율이 그를 깨운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절) 그리고 그는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기치를 내걸고 개혁을 위해 부르짖었다.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본질로 변화되어 가야 할 것인가는 바로 성경이 말해 준다. 내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는 학자들의 논리가 아니라 성경이다. 성경이 우리의 나침반이요 성경이 우리의 잣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어떻게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어떤 교회이고, 우리를 통해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그리고 철저히 성경 말씀을 토대로 오늘을 보고 앞으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 서기 위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 그분 안으로 들어가 나를 정제하고 우리 스스로를 새롭게 할 때, 우리는 그 속에 머물지 않고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생수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해답을 찾았다면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물이 지하 깊이 저장되어 있으면 또한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밖으로 분출되어야 생수가 되듯이 우리가 깨달은 것을 가지고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듯이 우리는 깨달은 바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개혁은 자기 자신의 개혁이다. 이것이 먼저이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나 혁명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다. 또한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해보겠다는 꿈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개혁이었다. 나의 생명, 나의 영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 문제의 고민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자기 안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그 힘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먼저 자신의 변화, 새로움에 대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서 겸손하게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알기는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항상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지식, 경험, 편견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진실하게 묻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답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답을 가질 때 우리는 개혁자의 삶을 살게 된다. 마치 에비앙의 생수처럼 그 생명력을 가진 값진 인생으로, 그러한 공동체로 우리 모두가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