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 사안에 관한 총회의 결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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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날개’ 사안에 관한 총회의 결의와 의미

 

   이번 102회 총회는 오랜만에 총회다운 총회를 보았다.”는 어느 총대의 평가처럼 비교적 진일보하고 성숙한 토론 수준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그 중에 논의의 긴장감을 더한 것은 단연 세계비전 두 날개 프로세스(이하 두 날개)’ 건이었다.

   두 회기를 거치고 이번에도 상정된 이 안건은 이틀 동안의 논의에서 일차 정치부로 갔고 정치부에서는 신학연구위원회로 보내자고 동의안을 냈으나 표결 끝에 100회의 결의를 따르기로 한 101회의 결의대로 기각되었다신학연구위원회로 보내자는 정치부의 안에는 이 문제의 근본적실효적인 해결에 대한 염원이 반영되어 있었다그럼에도 기각된 것은 거듭되는 논의의 누적된 피로감과 어수선하고 냉랭해지는 교단적 분위기에 대한 염려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100회의 결의는 총회에 속한 모든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총회가 확인하고더욱 총회 소속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고 승리할 것을 간절히 구하는 계기로 삼기로 한다.”였다이 문안이 모호성의 논쟁을 야기한 이유는 적확한 설명보다는 얼마간 두루뭉술하게 진술된 탓이다. ‘신학적 깊이와 균형의 실체에 대한 석명한 언표가 없고 구체적으로 총회가 두 날개에 관련하여 교회들에게 어떤 지침으로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기왕에 결의된 이 문안의 본의를 천착하여 그것을 바르게 적용하기를 바란다.

   우리 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의 정체성은 바른 신학이요 그것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사상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 기초 위에서 갖가지 운동들을 살피고 각자가 일탈하지 않도록 힘쓰자는 것이 결의의 본의이다. ‘균형이라는 말이 치우치지 말자는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가 목회 현장에서 신학적 오류가 없도록 조심하며 자기를 돌아보자는 것과 두 날개에 관련한 결의를 그 계기로 삼자는 것이 요점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차라리 목회자들이 개별적 필요성에 의해 관심을 두는 두 날개 운동과 같은 류의 목회적 운동들이 본 교단의 개혁주의적 정체성에 기초하여 신학적으로 바른지 항상 주의해 성찰하고 내용상 취사선택의 기준이 모호할 경우 총회적 점검과 지도를 받기로 한다.”는 실체적 문안으로 결의가 정돈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한 것은 헌의안이 수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날개의 모든 내용들이 총회의 인준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여유는 없다는 점이다전체든 부분이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살펴 수정하는 것은 언제든 바람직하며 나아가 심각한 오류가 입증되었을 때엔 중단하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모든 목회 활동에서 더 조심스럽게 개혁주의적 원리에 부적합한 부분들을 걸러내야 할 책임감을 돋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이것이 이번 결의를 수용하는 자세요 교단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이다따라서 이미 두 날개나 여타의 운동에 몸담고 있던 교회들이라 할지라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합류한 이상 수반되는 적응과 변화의 고통은 감내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이 개혁주의적 스펙트럼을 버릴 수는 없다따라서 결의문의 신학적 깊이와 균형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교단의 정체성의 모호함을 자처할 수도 있다한국교회의 특성상 앞으로도 많은 신앙적목회적 운동들은 명멸할 것이다

   그 중에는 일편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있겠지만 그간 유입된 운동들의 생태를 고려할 때 신학적으로 규명정돈되지 못한 실용주의적 경험론을 기초로 한 혼합주의 운동들이 매우 많을 것이다그런 운동들을 무작정 정죄하자는 것은 아니다그것을 지혜롭게 분별하며 그 본질과 기저에 배태된 위험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학적으로 바른 이정표를 세우려는 일이 폄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이신칭의 교리마저 공격을 받는 현황에서 우리는 매사에 신학적 고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번 결의는 사실 차선책더 나아가 고육지책이지 최선책은 아니다이는 상황에서 나온 지혜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그렇더라도 이 결의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총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비록 개개인이 그것을 다 수긍하지 못해도 총회적 결의를 순복하고 따르는 것이 옳다아울러 두 날개를 실행하는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교회들의 상호 맹목적 반감이나 배타심에 대한 우려가 기우가 되도록 서로 배려하기를 바란다난관이 있더라도 우리는 함께 교단의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해야 한다총회의 결의를 겸허히 받되 지속적인 연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 교단을 사랑한다면 총회의 결의를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비추어 우리가 어디만큼 왔는지 혹은 얼마나 멀어졌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두 날개 사안을 떠나 어떤 의미로든 개혁주의 정신이 퇴색하고 혼합적 요소들이 우리 자신과 교단 내에도 많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그런 것을 자체 정화하며 각자가 역사적 개혁주의의 본령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총회의 결의를 존중하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