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수상
목회자 칼라 calla
< 조봉희 목사_지구촌교회 >
무의미한 비판보다 비전지향적인 대안 제시와 사랑을 먼저하자
인도 격언에 ‘남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유대의 훌륭한 랍비 힐렐은 이렇게 가르쳐준다.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될 때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겉모습만 가지고는 남의 사정을 다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않고, 단면만 보고 판단하는 만큼 잘못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목회 현장에서 변명이 궁색할 때가 있다. 우리 지구촌교회에 처음 오신 분 중에 간간히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목사님은 왜 고개(목)가 뻣뻣한가요?’ 교회를 처음 방문한 분에게 긴 설명을 해드릴 수가 없어 죄송할 뿐이다. 나는 공수특전사에선 군복무중 허리골절상을 입었다. 5요추골절 융합을 위해 골반 뼈를 잘라 이식수술을 받았다. 그것도 실패한 수술을 받았다. 졸지에 상이군인이 되었다. 41년 전 일이다. 사실 죽지 않고 산 것만도 감사하다. 이런 허리의 장애와 강직성 후유증으로 결국 그 동안 견뎌오던 목 디스크가 터져 큰 수술을 받았다. 13년 전 일이다. 목뼈 하나는 인공디스크로 대체했고, 또 하나는 뼈 양쪽에 지지대(플레이트)를 넣어 고정시켰다. 평생 통증을 친구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나는 넥타이를 장시간 매는 것이 매우 힘들다. 목을 돌리기가 그만큼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차이나칼라 셔츠나 소위 목회자칼라 셔츠를 입는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남방 차림으로만 설교하거나 목회하기에는 덕이 되지 않을 수 있어서다.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Y셔츠와 넥타이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적합하여 입을 뿐이다. 내가 입을 수 있는 다른 옷이 없어서다.
그런데 최근 클러지칼라 셔츠(Clerical dress)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흔히 목회자칼라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스코틀랜드 장로교다. 1700년대 초기 스코틀랜드 장로교 도널드 맥러드 목사가 그 당시 명예와 지위를 상징하는 Y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권위로부터 낮아지려고 창안한 복장이다. 순수하게 겸손해지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이미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휘트필드, 존 오웬 같은 위인들께서 넥타이 대신 목을 감는 옷(neck cravat)이나 스카프를 매기 시작한데서부터 유래한다. 존 웨슬레도 목회자칼라 셔츠를 입었고,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선교사 스크랜턴도 클러지칼라를 입고 왔다.
18세기 당시 천주교에서는 개신교 복장이라고 거부해 오다가 지난 1967년 제2바티칸 공회 이후 사제복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로만칼라로 불리기도 하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그 출발은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다. 그것도 스코틀랜드 장로교다. 권위를 거부하고, 겸손해지려는 목사의 심정에서 시작한 것이다. 신분의식을 낮추려는 겸허의 의상인 줄도 모르고 입어 온 것이 죄송스럽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도 목회자칼라 셔츠를 받아들이거나 제도화시키자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옷을 입은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 지향적으로 입었을 뿐이다. 내 개인 사정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옷을 입는 것에 대하여 신학화할 사안이 아니다. 아무 문제나 ‘개혁주의, 또는 비개혁주의’라는 단서를 붙여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로 에너지를 쏟거나 빼앗겨서는 안 된다.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요즘 한국교회는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 많은 분들이 의욕과 용기를 잃어 가고 있다. 이처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목회하는 우리들에게는 서로 격려와 세워주기가 필요하다. 용기와 비전을 잃지 않도록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다.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잠시 동안만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합시다.”
이런 희망운동으로 영국 국민들이 용기를 갖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미한 비판보다는 비전 지향적인 대안 제시를 우선할수록 좋다. 물론 건설적이고 바른 비판이야말로 지극히 성경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지자적인 날카로움과 제사장적인 온후함의 균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과 은혜의 신비로운 조화다. 참된 개혁주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더 나은 대답을 가진 자가 더 나은 사람이다. 사랑으로 풀어 가는 자가 큰 사람이다. 지금 사랑하기도 역부족인데, 비판할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
『비판하면 밤이고, 사랑하면 낮이다. 비판하면 어둠이고, 사랑하면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