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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미래, 소통이 답이 아닐까?<1>
< 강치원 교수, 강원대 역사학_남포교회 장로 >
오늘날 교회의 소통은 대체로 형식적이어서 실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두들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교인 수와 헌금액이 줄어들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학교가 없어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현실 진단이 아니다. 대처방안이 절실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안다운 대안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해결 방안은 정말 없는 것인가? 요즘 교회 밖에서는 시대 변화와 함께 ‘소통’의 중요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시대와 사회에 비해 교회는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는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한 해답을 소통에서 찾고 싶다.
오래 전 한국 교회는 시대와 사회를 선도했던 적이 있다. 그때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소통과 교육에 관한 한 선진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국민 일반이 민주적 절차의 의사 진행 방식을 익히는 데에 교회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예컨대 회의의 구두 표결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그렇다. “…. 하기로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동의가 성립되어 의제가 되었습니다.” “이의 없으시면 예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같은 표현들을 우리는 교회에서 익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날 어떠한가. 지금도 교회의 회의 절차와 소통 방식이 사회보다 선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황은 역전되었다. 오늘날 교회의 소통은 대체로 지극히 형식적이어서 실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때 한국 교회 교육은 학교 교육보다 앞선 적이 있다. 소위 콩나물 교실에서 교사 1명이 과밀학급 수업을 펼치고 있을 때 교회는 소규모 분반공부를 했다. 전체로 모이고 분반으로 흩어지고, 분반으로 흩어지고 전체로 모였다. 교사당 학생 수라는 차원에서도 당시 교회 교육은 학교 교육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한때는 교회가 선진이었다는 말이다.
최근에 우리나라 학교 교육에서 수업 방식이 참여 형으로 현저하게 개선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 교육의 방식은 어떠한가. 교회의 분반은 학교보다 소규모이지만 교육방식은 여전히 대체로 일방적 전달이다. 교회 주일 학교 교사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교사는 주일 예배 시간에 담임목사로부터 설교를 듣는다. 또 주일 학교에서 담당 교역자로부터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분반공부 시간에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 공과 내용을 일방적으로 가르친다. 주일 학교 교사에게 있어 설교부터 분반공부까지 대체로 일방적인 셈이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어찌하여 교인들은 그토록 오래도록 설교를 듣는데 신앙 수준과 성경 지식에 있어 그 성숙이 더딘 것일까? 그에 대해 이런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난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듣기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학교 교육은 ‘듣고 외우고 시험 보고 잊어 버리는’ 방식을 개선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런데 교회 교육은 여전히 ‘듣고 잊어 버리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신앙 수준과 성경 지식이 깊어질까? ‘말은 생각 없이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만큼 알아듣는다’고 한다. 교육은 경험과 언어활동(experience and language)으로 이루어진다.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말을 해야 사고할 수 있다. 언어와 사고와 세계는 표상과 대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느 신학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외국에서 모셔 온 신학 교수의 강의를 통역으로 진행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강의가 끝난 후 청중들에게서 질문을 받지 않고 곧 바로 그 다음 강의가 이어졌다. 질문은 모든 강의들이 끝난 후에 한꺼번에 받으려나 보다 했다. 하지만 그날 행사는 질문이나 토론 없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교수, 신학생, 교역자, 성도 등 모두 그냥 듣기만 하였다. 질문과 토론이 없으니 그날 강의의 핵심은 묻혀 버리고 만 셈이다. 나는 좀 허탈했다. 진정한 소통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을 적절히 끌어내는 것은 훈련된 사회자의 몫이다.
소통을 공부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예수님은 마이크가 없는 시절인데도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실 수 있었을까. 목소리도 좋으셨을까. 얼마나 소통을 잘 하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관심을 갖고(막 5:21-43), 그들의 말로(요 4:1-42), 질문하셨다(막 8:27-38). 듣는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일까. 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들의 말로 소통하셨다. 그리고 질문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영원한 진리를 위해(요 3:16),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마 13장), 솔직하게 들려 주셨다(막 14-27-31). 영원한 진리를 전하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셨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화하셨다(눅 6:12-13, 막 14:32-4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질문을 던져 질문을 끌어내시고 (요 18:28-38),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셨다(요 7:53-8:11, 눅 10:25-37).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소통의 모범을 본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