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행진의 대열에 합류하라!”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언약 체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 언약을 계시하는 모형”
가을이 깊어 간다. 이 계절에 인간적 고독과 사색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나친 환상과 낭만은 우리의 기본 자아를 무너뜨리기 쉽다.
동서양을 무론하고 교회가 많이 타락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남은 자들을 부단히 일깨워주고 계시는 이 현실 앞에서 이제 진정 우리는 좀 더 개혁적인 삶을 살아야한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행진은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적극적인 믿음의 행보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라도 자기 자신을 예외라고 하는 저주스러운 함정에 스스로 빠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책임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언약의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이스라엘의 유다왕국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특징으로 다윗언약이라는 사상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가리키는 것인데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와 그의 후대의 나라가 어떠한 혼란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항상 다윗의 자손들이 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당시 다윗은 가나안 땅에 왕국을 건설한 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이 들어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언약을 베푸셨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지으실 것이라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여기에서 일종의 언어유희가 나타난다. 다윗은 성전과도 같은 건물로서의 하나님의 집을 의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가계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서의 다윗의 집으로 바꾸셨기 때문이다.
이 다윗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과 같은 신앙을 소유한 왕이 후손으로 계속 등장하여 왕조를 이루어나가는 데 있었다. 즉 그러한 다윗의 가계, 다윗의 왕조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어떠한 조건 하에서도 성취해 나가셨다. 물론 다윗 언약은 시드기야 왕 때에 와서는 결국은 끝을 맺었다. 그토록 다윗 언약의 패턴에 따라 끈질기게 이어져 나오던 유다왕국이었지만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언약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다윗언약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다윗 언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하신 언약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노아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모세 언약과 한 줄기 기다란 축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윗 언약까지 포함하면서 최종적으로 예레미아를 통해서 새 언약의 도래가 예고된 그러한 언약 체계 전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새 언약을 계시하는 모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데 성도에게 이러한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자각시켜주는 뚜렷한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아가 복종한다는 데서 찾아지게 된다.
이 복종하는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하면 성령께서 성도의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여 주신 사실이다. 물론 매사에 완벽하게 순종하지는 못 한다. 옛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부패성이 습성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어제보다는 오늘은 더 낫기 마련이고 따라서 내일은 더욱더 낫다. 비록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멈춰 있지는 않는다. 기어코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하나님의 학교라고 하는 운동장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항상 전진하는 것이다. 성도가 은혜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성도가 은혜를 받았다고 할 경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전반을 체계적으로 잘 이해하는 동시에 전폭적으로 신뢰하면서 적극 순종하는데서 온전한 모습을 나타내는 법이다. 이는 그의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기를 그치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데로 전환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참으로 성도의 속에는 더 이상 옛사람의 생명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약동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변화이다.
그러니 이 패역한 시대와 의연히 결연하고 나름대로 소수의 남은 자요,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가난한 자로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있는 우리로서 진정 그러한 사람이 되기로 원한다면 이 비극적인 시대를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예레미야처럼 이미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랐는가? 루터나 칼빈처럼 할 만큼 했기에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인가? 차라리 그랬던 것처럼 착각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식은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성도로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의무조차도 저버리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하여 개혁된 교회의 교회 구성원답게 치열하게 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울 만큼 배웠고 우리 각자의 신앙적 삶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를 구현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확인할 만큼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