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담긴 함의_노승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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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담긴 함의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믿음은 특별계시 통해 계시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지식”  

   칼뱅은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지식을 포함합니다(기독교강요 3권 2장 2절). 그런데 칼뱅이 이 표현을 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지식이란 대상과 인식 사이의 일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은 그 기초가 우리 인식에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자연스런 전제였던 대상 세계가 우리 인식으로부터 도려내어진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지식의 기초를 우리가 지닌 회의적 인식에 놓은 후부터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은 지식으로서 전체 세계를 자기 내적인 체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후기 모더니즘은 이런 체계가 도리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과 한계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타자라는 대상을 인식의 영역으로 받아드려서 객관 개념을 대상과 인식의 일치가 아니라 상호주관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지만 이 역시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곧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거기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반사로 출현합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을 보면 기독교 윤리학에서 A학점을 받는 신학생이 인종차별을 하는 장면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신약학자 한 사람도 그가 쓴 글에 비해 매우 좋지 않은 평판을 얻고 있으며 교회사학자이며 저명한 학자인 어떤 교수도 인종차별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세례파이면서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어떤 사람은 여러 자매들을 장기간에 걸쳐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기 연구를 빌미로 말입니다.

   이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지식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보십시오. 학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덕적일 필요도, 인격이 훌륭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잘 전달하면 그뿐입니다.

   국회에서 관료의 청문회를 할 때 도덕적 기준들은 형식적 사항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도 재능만 있다면 그리고 그 재능으로 인정을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계시를 우리 인식의 내용으로 받는 패러다임을 버린 탓이라고 할 것입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말합니다. 특별 계시뿐만 아니라 자연 계시 전체가 우리 인식의 대상이며 이것이 우리 지식의 근거라는 사실을 버린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을 버린 채로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해도 사실 헛된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지식이란 자기 체계이거나 혹은 이웃과 더불어 하는 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그 수여자이신 하나님을 고려한 체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근대적 데카르트 체계를 버리고 계시적 체계, 곧 계시하신 하나님과의 대면을 전제로 한 체계인 것입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설명함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지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대면하여서 그 계시를 아는 것은 동시에 자기를 아는 일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에 현대에서 지식은 대상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자기의 상태와는 전혀 무관하게 대상을 알 수 있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과 무관하게 대상을 잘 설명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를 기초로 한 인식은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대면하여 알 때, 상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알려는 마음이 커지고 사랑이 커질수록 자기에 대한 인식도 함께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 투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납니다.

   이 계시를 그저 나와 무관한 어떤 대상으로 아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으로부터 유리된 지식이 바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대상이신 하나님을 도려내고 자기를 기초로 지식의 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칼뱅이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때, 이는 계시를 도려낸 인식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육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 뜻에 대해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것은 참된 의미의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인식이 전제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인식에 바로 믿음이 존재한다는 말인 셈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이런 문맥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특별계시를 통해서 그 너머에 계시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세간에 유행하는 말 중에 사랑을 글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속에서 배운 적은 없고 책으로만 배운 것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단지 글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경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그 곳에 바로 참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