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적 작정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하나님은 그 대상의 어떠한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작정하시지 않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 제1절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서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되어질 모든 것들을 작정하셨다”라고 진술한다.
17세기 바젤의 신학자 요하네스 볼레비우스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부터 계획된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이 있다. 일반 작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우주 안에 권능의 영광과 지혜와 선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특별 작정은 예정이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이성 있는 피조물 안에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자비의 영광과 공의의 영광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 작정이다. 이러한 절대적 관점에서 그 모든 유효적 원인은 택자도 그 택자의 신앙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관련 구절로서 시편 33편 11절에서 다윗은 선포한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를 직역하면 이러하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원토록 서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의 계획은 대대에 서 있을 것이다.” 70인경을 역본하면 이러하다. “주님의 의논은 영원히 거한다. 그의 마음의 생각이 대대로 있다.”
이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가운데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무쌍하게 적응하여 가신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변하지 않고 다만 시대와 역사 안에서 다양한 경륜을 통하여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신자가 신적 작정의 교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계획이 어느 정도 보여 알 수 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최고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첫 자리이다.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되어지도록 작정되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것은 변개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신 것이다.
신자들은 여호와의 계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아가면서 인류의 마지막까지 보게 되며 그로부터 세상의 육신적 가치를 최종적인 가치로 삼고 살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 신앙이 증거하는 나그네 신학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허망한 명성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신자들은 모두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져 있고 주와 동행함으로서 감사하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다. 자기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는 모두 거짓 신앙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례를 사모하며 그 율례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3장 1절 후반부에 “그러나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의 저작자는 아니시다. 그래서 피조물의 의지에 대하여서 강제적이지 않으시다. 두 번째 원인자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우신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죄의 책임까지도 인간에게 전가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의 죄책은 인간에게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저작자가 아니시다. 시편 기자는 증거한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시 5:4). 그렇다. 하나님은 죄에 책임을 지셔야 하는 죄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시편의 말씀처럼 죄악이 주와 함께 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기뻐하셨으나 아담의 범죄를 기뻐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죄악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그 창조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는 인간 편에서 스스로 이끌려서 범죄한 것이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저서 1장 13-14절에 이렇게 진술하였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3-14).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범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피조물의 의지에 대하여서 강제적이지 않으시다. 두 번째 원인자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우신다”라고 진술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의지로 범죄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신적 작정 아래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제2절에는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예상되는 조건으로 되어질 것을 아셨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어떤 것을 그가 장래에 그것을 혹은 그러한 조건으로 되어질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에 작정하신 것은 아니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에 기초한다. 결코 그가 작정하시고자 하시는 그 대상의 어떠한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서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에 반대하여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 대하여서 예지하시고 그 조건을 따라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는 자유의지라든가 선행 등을 앞서 행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조건적 선택 교리는 매우 위험한 거짓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어떠한 상태도 예지하시기 전에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서 예정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11-16절에서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하시고 유기하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진술을 따라서 볼 때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인간의 자유나 우연성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책임성을 돌리는 형태로 세우신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신의 행위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치 못할 것이다(롬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