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둥지에서 온 편지<9>| 기독교강요 전함에 승선하라!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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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전함에 승선하라!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칼빈신학에 대한 이해와 적용의 필요성 요구돼”

  지난 여름 대단했던 무더위와 폭염을 뒤로하고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변해간다. 다들 고생이 많으셨다.   요즘 필자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다시 공부한다. 그동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느라고 이제야 철이 들었나보다. ‘근본도 모르고 목회를 해왔구나!’ 하는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영혼의 공허감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마음속에 ‘목사의 인격상의 결함은 다소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목사의 성경해석상의 결함은 어떠한 이유라도 용서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해석도 때로는 들어서 쓰시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사역자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러던 중 얼마 전 합동신학원 2학기 개강심령수련회 강사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평소 설교를 잘 못하는지라 네 권의 기독교강요 개관으로 설교를 했다. 어떻게 보면 교수님들도 계시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고 온건 아닌가하여 교회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칼빈을 말하고 박윤선 목사님을 말하는 것은 그분들의 인간적인 면보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제일 깊이 이해하고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 우리가 선배들의 신학적 업적을 평가할 때도 인간적이거나 세상적 관점에서 보고 떠받드는 게 아니다.

  세계 칼빈학회회장을 엮임한 헤르만 셀더르하위스는(Herman J.Selderhuis)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방주(ark)에 비유하면서 예찬하였다. 방주 혹은 전함, 심지어는 화물선을 조종하여 대해를 항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칼빈은 그 일을 해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이렇듯 배에 비유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는 1536년에 돛단배(sailboat)로 항해하기 시작했지만, 초판 6장에서 시작하여 최종판 80장으로 늘어난 화물선(cargoship)이 되어 신학적 화물을 나르는 상자로 가득 찼다.   칼빈은 이 책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화물선이 전함으로 변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변호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전함은 복음을 공격해오는 원수들과 싸우며 잠수해있는 위협적인 세력과 오래 버티면서 때가 되면 반격을 개시할 요새들을 공격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기독교 강요는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 목사, 교수들이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교부와 스콜라 철학자, 교회개혁자들과 신비주의자가 시대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아 정돈된 피난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일종의 노아의 방주(a sort of Noah’s ark)로 생각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주를 통해서만 이단과 불신앙의 물결 속에서 진리가 안전하게 보존 될 수 있다.   조병수 총장 역시 “개혁주의는 치사한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신학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개혁주의 교회를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회인 이 거대한 항공모함이 최고의 전투력과 구축함, 호위함을 대동한 채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전지하고 그 옆과 앞과 뒤는 비록 인간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 신학이나 교회이나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즉 범선, 상선, 여객선, 화물선 등 다양한 배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더불어 같이 함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같이 가는 것이다.”

  전함이라고 해서 작은 배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다 지치거나 배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달려가 도와주어 좌초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조류나 항해의 조건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망망대해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득 태우고 온갖 악조건과 싸워 나가는 것이다.   당당하고 위용 있게 자부심과 명예를 갖고 달리되 온유하고 겸손하면서도 개혁주의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행복한 신학이라는 것을 뭇 인생과 역사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방주가 완성되자 홍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지만 개혁주의, 즉 보수주의의 전통 안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교회의 정식 회원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을 계속 휩쓸었던 쏟아지는 신학 작품의 홍수 속에서도 굳건히 생존하게 만들었다.   칼빈은 자신의 책을 신학적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기창고로 생각하면서 집필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신학자의 임무는 사변가들의 귀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박영선 목사는 “신학교육은 전체신앙의 내용의 개관과 균형질서를 깨우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설교는 우리가 겪는 일상이 진리와 생명에 관한 현실적, 구체적 도전이라는 것을 밝혀 진정한 답을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또 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대해 큰 통찰을 가지지 못하고 비난만해서도 안 된다. 더 좋은 신앙이 더 비판적이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지금은 목사의 진정한 임무회복이 필요한 때이다. 목사의 주된 역할은 설교와 목양이다. 물론 목양은 설교라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설교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건전한 교리를 신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해야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의 교회의 개혁 혹은 참된 교회의 형성이란 신앙고백을 확정짓는 일이었다.   이 신앙고백의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해야하는가는 이후 교회가 이에 기초하여 신앙고백을 확정하는 작업을 통해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칼빈은 이것을 교회의 정체성 확립 및 유지와 연결시켰다는데서 다른 개혁자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만의 특유의 독창성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칼빈신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적용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금은 항상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종교개혁의 원리가 이전 어느 때 못지않게 요긴한 때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개혁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개혁되고 있으며 개혁하고 있는가?’이다.

  가을도 곧 깊어지고 노회와 총회도 바빠지는 시간들이다. 우리 교회가 무엇인지 치밀하게 연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 교회 하나를 이 땅에 크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반듯하게 세워 놓고 가자.   혹 누가 심령이 메말라 교회를 찾아왔을 때 “어디 교회가 없어 합신교회를 찾아왔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한번 힘을 내서 잘해보자! 혹 우리가 어떤 면에서 비판을 하게 되더라도, 어디서 신학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무슨 오해가 있고 어떤 못난 모습이 있어도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참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