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71) 사선에 선 목회자: 광야의 비둘기, 꼬르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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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에 선 목회자: 광야의 비둘기, 꼬르떼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극렬한 박해 속에서 프랑스 위그노 교회의 재건을 위한 도약이 된 1715년 8월 24일의 제1차 광야노회는 스무 살의 젊은 엉뚜완느 꾸르(Antoine Court)와 몇 사람의 결실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초대 광야노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는 연배가 높은 걸출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한 사람이 삐에르 꼬르떼(Pierre Corteiz, 1683-1767)이다. 그는 루이 14세가 낭뜨 칙령을 철회하기 이태 전인 1683년 7월 28일에 로제르(Lozère)에 있는 노자레(Nojare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자끄는 그곳의 지주로 위그노 교회의 장로였다. 갓 청소년기를 벗어난 꼬르떼는 1700년부터 루이 14세에 저항하는 까미자르 군대에 가담하여 설교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까미자르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인 1704년에 꼬르떼는 고위 공직자가 발행한 여권을 입수하여 스위스 로잔으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까미자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고 특히 예언자들(“영감 받은 자들”)을 멀리했다. 하지만 그는 로잔에서 방직공으로 일하는 중에 다시 까미자르와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고 있는 프랑스로 귀환하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봉기가 무위로 돌아가자 꼬르떼는 제네바에 남았다가 1709년에 아르노(Arnaud)와 사바띠에(Sabatier)라는 두 명의 설교자와 함께 프랑스로 귀환해서 순회 설교를 재개했다. 후에 아르노는 사형을 당했다(1718.1.22.).

 

1712년 5월, 그는 다시 로잔으로 돌아와서 29세의 위그노 과부 이사보 나달(Isabeau Nadal)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아들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다. 1713년 5월, 꼬르떼는 불온한 상속 사건에 휘말려 로잔에서 추방을 당해 제네바로 피신했다가 프랑스로 발걸음을 돌려 도피네 지방을 거쳐 세벤느 지방에 이르렀다. 1715년에 랑그독 지방으로 가서 엉뚜완느 꾸르와 합류하였고 몇 명의 까미자르 옛 동료들과 함께 위그노 교회의 재건을 시도하였다. 목사가 아닌데 설교한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꼬르떼는 1718년 8월 15일에 취리히에서 목사로 임직했다. 그리고 같은 해 늦가을에 열린 세 번째 광야노회에서 엉뚜완느 꾸르를 목사로 안수하여(11월 21일) 랑그독 지방의 목회를 돕도록 요청했다.

 

여러 번 광야노회를 거친 후에 마침내 1726년 5월 16-17일에 비바래(Vivarais)에서 제1차 광야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꼬르떼를 비롯해서 자끄 로제(Jacques Roger, 1665-1745)와 꾸르 같은 세 명의 목사와 여덟 명의 목사 후보생, 그리고 서른 여섯 명의 장로가 모였다. 로제 목사가 의장을 맡았다(1745년에 사형을 당했다). 초대 광야총회는 예언 운동과 여성 설교자들을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과 치리 구조를 재천명하였다. 여기에서 장로들에게 예배에 조력할 것을 강조하였고, 국왕에 대한 무력 항거를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삐에르 뒤랑(Pierre Durand)이 목사로 임직하여 열정적으로 비밀 순회 목회를 했다.

 

1728년, 꼬르떼 목사는 꾸르 목사의 요청에 따라 1685년의 낭뜨 칙령 철회부터 1728년까지 위그노 교회에 벌어진 주요 사건들에 대하여 “역사 기록”(Relation historique)이라는 제목을 단 회고록을 썼다. 1733년까지 그는 세벤느에서 활동했는데 주로 단독으로 일했지만 때때로 꾸르가 랑그독에 있는 동안에는 함께 일을 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국과 군부가 파놓은 덫과 함정을 잘 피해 갔고, 도덕적으로는 흠결이 없어서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는 광야의 비둘기라고 불릴 정도로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 중에도 세심하게 일기를 작성해서 로잔에 있는 목사들, 꾸르 목사, 그리고 부인과 딸에게 정기적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불순한 목사에 대하여는 엄격한 치리를 주장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 성경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가장 작은 사건에도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신학을 옹호했다.

 

1733년, 꼬르떼 목사는 취리히로 가서 부인과 딸과 합류하였고 1767년 사망할 때까지 시의회의 연금을 받았다. 이후 생활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1738년의 님(Nîmes) 지역의 노회 기록을 볼 때 한동안 목회를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노회에서 로잔 신학교를 갓 졸업한 라보(Paul Rabaut)가 목사로 임직하였다. 험악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의 일꾼을 길러냈던 것이다.

 

[그림. 꾸르를 목사로 세우는 꼬르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