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70_사선에 선 목회자: 교회 재건의 선구자 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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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70

사선에 선 목회자: 교회 재건의 선구자 꾸르

제공: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대표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1698년 11월 4일, 처절하게 부서진 프랑스 교회를 혼신의 힘으로 이끌던 부르쏭(Brousson) 목사가 교수형을 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으로 위그노 운동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부르쏭 목사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불씨였기 때문이다. 부르쏭 목사가 붙인 교회 재건의 불씨가 잠시 재 아래 숨어있는 듯이 보였지만 이내 잿더미를 헤집고 올라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비성경적이긴 했지만 예언자들이 속속 등장해서 신자들에게 열을 가했고, 비록 군사적으로 열악하긴 했지만 까미자르(민병대)가 봉기해서 신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 끝에 엉뚜완느 꾸르(Antoine Court, 1695-1760)라는 인물이 위그노 운동의 무대 위에 혜성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꾸르는 비바래의 작은 마을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개혁파 신앙을 독실하게 견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낭뜨 철회 후에 어쩔 수 없이 가톨릭 세례를 받아야 했던 신세대에 속한다. 어린 꾸르는 교구 학교에 입학했는데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급우들에게 자주 폭행을 당하거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엄한 제재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소년 꾸르는 밤에 흐릿한 호롱불 아래 모이는 가정 신앙 모임에서 꾸준히 성경을 읽었고 개혁파 문서를 공부하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나갔다. 그는 심지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위그노 비밀집회에 참석하였고 꽤 과격했던 까미자르 지도자 마젤(Mazel)의 설교를 듣기도 하였다.

 

영적으로 갈급했던 소년 꾸르는 여러 지역을 순회하는 예언자들과 직통 계시를 강조하는 광야 설교자들에게 한동안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그들을 따라 비바래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위제스(Uzès)와 님(Nīmes)에서 활보했고 심지어 도피네(Dauphiné)까지 가서 설교하는 열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후에 꾸르는 ‘영감받은 자들’의 환상과 예언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예언자들과 급격하게 관계를 끊었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연배가 높은 동료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는 설교자 꼬르떼(Corteiz, 1683-1767)와 목사 로제(Roger, 1665-1745) 등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로제는 1715년에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로 도피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715년 8월 21일, 꾸르는 세벤느(Cévennes) 지역의 작은 마을 몽떼제(Montèzes)에 있는 채석장의 한 오두막에서 첫 번째 ‘광야노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다섯 명의 설교자와 네 명의 신도가 모였다. 꾸르가 의장으로 선출되어 모임을 이끌었다. 이것은 위그노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노회였다. 참석자들은 위그노의 광야교회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교회와 연결시켰다. 초대 광야노회는 위그노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몇 가지 지침을 세웠다.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를 설립하고, 라로쉘 신앙고백을 따라 교회 치리를 회복하여 장로 제도를 도입하며, 예배를 집례하며 설교를 담당할 목사를 장립하고, 열광주의에 사로잡힌 예언 활동을 중지시키는 것이었다. 장로는 집회를 준비하고, 목사를 안전한 거처로 안내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금하는 책임을 졌다. 이후 광야노회는 여러 차례 횟수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1726년 5월 16~17일 첫 번째 광야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꾸르와 꼬르떼는 목사가 아님에도 순회 설교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1717년에 꼬르떼가 먼저 스위스 취리히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아 공식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고, 1718년에 열린 제3차 노회에서 꾸르가 꼬르떼에게 안수를 받아 목사로 장립되었다. 이태 후에 그는 제네바로 가서 2년 동안 신학 수업을 완료하고 귀국하여 결혼했다. 1724년에 설교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이 떨어졌고, 꾸르의 머리에도 엄청난 현상금이 걸렸다. 결국 꾸르 목사는 스위스 로잔으로 피신하여(1729) 위그노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교를 설립해서 사망할 때(1760.6.13.)까지 학장으로 일했다. 로잔 신학교는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위그노 교회에 많은 목사를 제공하는 쾌거를 일구어냈다. 꾸르의 영향으로 뒤랑(Durand)과 라보(Rabaut) 같은 걸출한 목사들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