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밀한 개혁신학,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
최찬영 목사 • 합신 44회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D.min 과정
최근 한국 교회 안에서 개혁신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공부하는 모임이 생기는 등 개혁파 신학이 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성경적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서려는 갈망은 건강한 것이고, 개혁신학은 그런 토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혁신학의 엄밀함을 따르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교리적 정확성보다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식의 피상적 권면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개혁신학 자체가 아니라, 엄밀한 개혁신학을 붙드는 우리와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개혁신학의 강점은 논리적 일관성과 체계성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복잡했던 신학적 질문들이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때로”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우월감으로 변질되고 맹목적 비난과 사랑없는 정죄로 이어진다.
또한, 엄밀함은 종종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한다. 칼빈 주의/알미니안주의, 언약/세대주의, 장로교/회중교회등 명확한 구분은 도움이 되지만, 이 명확함이 편협함이 되어 우리의 판단 방식 전체를 지배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와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을 “틀린 사람들”로 분류하고, 수십 년 목회한 목사라도 자기 신학 체계와 다르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으로 쉽게 여기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나는 개혁주 의자다”라는 정체성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더근본적인 정체성을 압도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 그것은 첫째, 끝없는 정화 작업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더 순수한 형식을 찾아 시편 찬송, 머리덮개, 주일 규범 등을 강화하며 점점 엄격한 기준으로 나아간 다.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칠 경우 그 과정은 끝이 없다. 이전 단계는 늘 ‘타협’으로 규정되고, 공동체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급기야 극단적 결론에 이르러 스스로 고립되기도 한다. 둘째, 편협한 교리에 대한 이해는 신앙생활에서 문제를 발생하게 한다. 예정론을 잘 이해했다며 전도의 긴박함을 잃어버리고, 또 언약신학을 강조한다며 가정을 율법으로 통제하며, ‘바른 교회’를 찾는다며 사소한 문제로 교회를 분열시킨다. 개혁신학의 편향성이 오히려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셋째, 분별력이 분열의 도구로 변한다. 종말론이 다르다고, 찬송 방식이 다르다고, 또한 교단이 다르다고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진리를 지키기 위한 분별이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높이고 타인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곤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는 개혁신학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개혁신학의 엄밀함이 우리의 특정 성향과 만날때 발생한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개혁신학의 체계성에 심취하면 끝없는 정화 작업에 빠지고, 확실성을 갈망하는 사람이 명쾌함을 만나면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며, 쉽게 교만해지는 사람이 깊이 있는 개혁신학의 맛을 보면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한다. 개혁신학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을 가르친다. 웨스트 민스터 총대들은 그들의 문서를 “성경 다음의 권위”라고 여기며 성경만이 신적 권위가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 겸손히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신앙의 선진 들의 겸손은 닮지 않고, 그들이 만든 체계만 이용해 우리의 확신을 정당화한다. 나 역시 이 함정에 빠지곤 했다. 신학을 처음 공부할 때 다른 이들과 교회를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정확한 교리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첫째,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겸손을 잃으면 신학은 곧교만의 무기가 된다. 둘째, 교리가 삶에서 어떻게 작동 하는지 배우면서 그 열매 또한 살펴야 한다. 바울은 “지 식은 교만하게 하되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말했다. 우리의 신학이 더 깊은 경건과 인내와 사랑, 온유함을 낳는가? 아니면 더 많은 논쟁과 분열, 고립을 낳는가? 신학공부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셋째, 건강한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 혼자 공부하면 편향된 자세와 태도를 바로잡기 어렵다. 보편교회 교사의 지도와 더불어 성숙한 성도들의 삶을 통해 균형감을 배워야 한다. 넷째,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 삼위일체와 구원 교리는 타협이 없어야 하지만, 찬송 방식이나 성만찬 절차는 교회의 다양성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떤 장로교 목사는 신학을 다룰 때 ‘80대 20 원칙’ 을 말했다. 80%는 역사를 통해 검증된 정통의 길을 따르고, 20%는 탐구의 여지를 남기되 그 비율을 뒤집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개혁신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중심 교리가 우리의 기반이어야 한다. 더 세부 적이고 논쟁적인 주제들은 우리의 이해를 풍성하게 할수는 있지만, 기반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개혁신학은 보배다. 그러나 우리는 질그릇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엄밀한 개혁신학은 우리를 더 가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다듬는다. 이것이 우리가 개혁신학을 붙드는 이유이다. 개혁신학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더 정확한 신학자가 될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 도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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