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인생”
김학인 목사/ 본보 편집국장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황가람 노래 ‘나는 반딧불’의 가사 일부분이다. 자신에게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다 지치고 무력감을 느껴 성공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내용이라고 이 노래를 소개한 것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높고 넓게 비추는 인생은 아니어도, 그저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인생일 수 있다.
임명태 소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중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 빛이었거든” 빛이 아주 조금이라도 그게 빛이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 빛이 얼마나 어둠을 뚫고 더 환하게 비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빛이기에 그것 자체로 이미 아름답다. 그 빛은 삶의 희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조명가게엔 세상을 빛나게 할 수많은 전구가 전시되어 있다. 값싼 제품부터 값비싼 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시골 헛간 어딘가에라도 가서 빛을 비춰야 그 전구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값비싼 전구라도 그냥 조명가게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한 아무 소용도 없다.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춰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두워진 마음에 한 줄기 빛이라도 비춰주면서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한 번 주신 인생인데 각자에게 주어진 빛의 색깔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찬란한 빛이었든 간에 말이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라는 찬송가 515장 가사를 떠올려 본다.
마지막 숨 거둘 때 누구에겐가, “당신은 내 삶에 희망의 빛을 선사해 주었다”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런 빛이 조금씩 많아지게 될 때 가정을 넘어 사회 에도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희망도 전염성이 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작은 빛을 발하며 산다고 한들 사회가 변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나 하나 꽃피워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게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 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 냐.” (조동화 시, ‘나 하나 꽃피워’).
우리 서로가 빛나는 인생이 되어보자. 내가 돋 보이는 인생을 살자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빛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인생을 말하는 것이 다. 과연 나는 내 가족에게, 늘 만나는 사람들 에게 그 인생을 조금이나마 밝게 하며 살고 있을까? 세상살이가 참 팍팍하고 고단하다. 점점 미움과 증오와 갈등이 증폭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어디선가 봄의 햇빛 같이 비치는 위로와 희망이 필요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아니 그것을 기다 리지 말고 우리가 작은 볕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
주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교회 안에만 머무는 빛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 빛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다. 믿는 이들이 진리의 빛으로 살아갈 때 그 빛을 통해 많은 이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올 것이다. 진정한 빛은 어둠에 감추어질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그 자체로 빛나는 인생이요, 빛내는 인생임을 깨닫고 오늘도 빛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