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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이야기 48
빛나는 인물: 위대한 정치인 쉴리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
앙리 4세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프랑스는 거의 40년에 걸친 종교전쟁의 여파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가 전국이 폐허가 된 상태여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고, 국정은 여전히 가톨릭과 위그노가 양극단으로 갈라져 다투는 상황에 빠져있었다. 이때 앙리 4세를 보좌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프랑스 재건의 대부”라고 불리는 위대한 정치인 막시밀리앙 베뛴 쉴리(Maximilien Béthune Sully, 1560-1641)였다.
쉴리는 위그노 귀족의 슬하에서 출생 하여 신교 신앙을 받으며 자랐다. 열한살 나이에 앙리 나바르(후일 국왕 앙리 4세)의 궁정에 와서 평생 조력자로 발돋 움하였다. 쉴리는 13살에 바뗄레미 대학살을 경험했다. 1572년 8월 24일 새벽녘,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 리에 잠에서 깬 그의 후견인은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문을 열었다가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고, 시종은 쉴리를 도피시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삼았다. 쉴리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가톨릭 기도서를 높이 들고는 자기의 학교로 가서 교장의 보호를 받았다.
아버지는 쉴리가 살아남은 것을 알고는 파리에 머물며 앙리 4세를 도우라고 조언하였다. 이때부터 쉴리는 앙리 4세의 측근이 되어 헌신적으로 조력하면서 종교전쟁의 여러 전투 참전하였는데, 특히 1590년 앙리 4세가 파리를 공성하기 위해 벌인 이브리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등극하자 쉴리는 재상으로 활약하면서 종교전 쟁의 폐해로부터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
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총력을 쏟아부었 다. 그는 프랑스 전역에 간선 도로를 점차 포장하고 길가에 느릅나무를 심었 다. 가로수는 도로의 선을 확정하여 행인을 보호할 뿐 아니라 군선과 전함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재목을 공급해주었 다. 그는 특히 파리를 정돈하여 도시화 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수로를 파서 물길을 만들었다. 파리 시민의 위생을 개선하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 다. “경작과 목축은 국가의 젖줄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농업에 관심이 컸던 쉴리는 혁신적인 위그노 농경학자 드 세르를 불러들여 튈르리 정원과 아스날 지역에 뽕나무를 재배하게 했다. 누에를 양식하여 명주실(견사)을 만들어 비단 산업을 발전시킴으로 국가 경제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쉴리는 국왕 앙리 4세의 가계 경제까지 책임을 진 신실한 충신이었다. 그는 가톨릭이건 위그노건 왕을 해치려는 귀족들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의 결혼을 중매한 것도 쉴리였다(1600년). 그는 위그노 신앙을 지키면서도 가톨릭 세력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프랑스 안에세 종파(가톨릭, 위그노, 루터파)를 공존시키려는 “대국적 계획”까지 구상하 였다. 쉴리는 많은 고심 끝에 프랑스의 단합을 위해서 앙리 4세가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는 것에 동의하였고, 이로써 앙리 4세는 1593년 7월 25일에 공식적 으로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쉴리 자신은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심지어 프랑스 총사령관 직을 맡는 것도 고사하 였다.
[쉴리. 파리 국회의사당 앞 좌상]
쉴리는 가족과 함께 파리 근교에 있는 샤릉똥 교회의 예배에 충실하게 참석하 였다. 1602년 9월 29일, 아들 막시밀리 앙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그는 1609년 9월 15일, 결혼식을 올렸다). 대모는 꼴리뉘 제독의 딸 루이즈였다. 바뗄레미 대학살 때 남편을 잃은 루이즈는 이후 네덜란드의 침묵공 빌렘과 재혼하여 오랑쥐 왕녀가 되었다. 1605년 에는 딸 마르그리뜨가 앙리 로한 공과 결혼하였다. 로한은 앙리 4세가 피살된후 1610년부터 1630년까지 위그노 저항군을 이끈 “용감한 영혼, 견고한 생각, 인자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다.
1610년 5월 14일, 국왕 앙리 4세는 쉴리에게 병문안하러 가는 길에 파리 한복판에서 가톨릭 열성분자의 칼에 찔려 숨졌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루이 13 세가 너무 어린 탓에 모후 마리 메디시가 섭정하면서 쉴리는 실각하였다. 지금도 파리를 비롯해서 샤릉똥 등 프랑스 전역에 쉴리를 기리는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