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심문관과 베드로_장홍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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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과 베드로

 

장홍태 선교사_ GBT, SIL아시아 디렉터, 경북노회 새비전교회

도 스 토예 프 스 키 유 작 『 카 라 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은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으로 불리곤 하는데, 그 안에 서도 제5권에 나오는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편은 정수로 손꼽 힌다. 작중 인물인 이반 카라마조프는 자신이 지은 이야기라며 이 단편을 들려주는데, 무신론자 지식인답게 철저한 이성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실패라는 비판을 펼친다. 그의 이야 기는 이렇다.

이야기의 배경은 15세기 스페인 세비 야로, 그곳에서는 매일 화형대의 장작 더미에 이단으로 지탄받던 자들이 불태워지고 있었다. 절대권력을 쥔 대심 문관이 백 명의 이단을 화형에 처한 다음 날, 예수 그리스도가 조용히 강림한 다. 그는 1500년 전 자신이 유대를 거닐었던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다가 가, 애틋한 마음으로 한 죽은 소녀를 되살린다. 이 모습을 목격한 대심문관은 즉각 친위대를 급파해 그리스도를 체포한다. 지하 감옥에 투옥한 후, 은밀히 그를 찾은 이 노령의 대심문관이 묻는다. “신은 왜 나약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나약한 사람을 영원한 시험의 고뇌 속에 살게 한 것인가?” 자유는 인류에게 감당 못할 짐일 따름이며, 그런 짓거리를 펼치는 그리스도를 자기는 당장 화형에 처하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나마 자신이 하나님의 실수를 바로잡고 있는데, 다시 어지럽히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모든 말 을 묵묵히 들은 그리스도, 그는 대심문 관의 말이 끝나자 그의 볼에 조용히 키스를 건넨다. 대심문관은 결국 그리스 도를 풀어주지만,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요구한다.

사실 이 비판의 목소리는 저자 도스 토옙스키의 믿음과는 정반대 편의 것이 다. 소설 전체가 이반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기 때문이다. 신과 믿음의 허구성을 논하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들은 작품 속 알료사만 하더라도, 그는 이복형 이반과 논리 싸움을 벌이지 않고 이반의 입을 맞추며 끌어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키스에 버금가는 사랑과 겸손으로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에게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거절한 것을 두고 분노한 것은 흥미롭다. 너무나도 평범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유보다 배고플 때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보호받는 ‘신비, ‘세상의 권력을한 손에 움켜쥔 ‘권위’ 같은 것으로 숭배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에게 자원하는 순종을 기대하기보다는, 지상에서 왕국을 건설 하고 인류의 화합을 도모할 권위를 행사했어야 한다며 그리스도를 단죄한 다.

비슷한 대화는 실제로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도 이뤄졌던 것을 아는가?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 냐?”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멋지게 답했다. 그러 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 들에게 잡혀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강력히 반발했다(마 16:21~22). 그가 주님을 붙들고 “항변하였다”는 헬라어 동사 ‘에 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주님께서 폭풍을 꾸짖으셨을 때(막 4:39)나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을 때 책망하셨던(마 9:25) 것과 같은 표현이었다. 베드로 보기에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라니, 그것은 처참한 실패이자 그간 충성을 바친 자기들의 수고도 무산되는 일이었 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어쩌면 도스토 예프스키의 소설 속 대심문관이 재림한 그리스도에게 분노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주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말씀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탄의 행위였다.

이 단호한 말씀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단을 사냥하고 불태워 죽이던 대심문관이 도리어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듯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는 위험 하기 짝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사랑과 섬김이 아닌 실력 행세로 하나님의 나라를이 땅에 건설하겠다는 주장은,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소치다. 더딘 듯하여도 희생과 인내로, 완전한 사랑과 정의를 이루시는 우리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 하여야,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